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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다. 가을을 천고마비의 계절이라고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말조차 한적한 정자의 처마 밑에 낀 이끼처럼 박제되는 중이다. 그런데 한가위도 그럴 것 같다. 한가위의 정경이 고색창연하게 다가 올 시대가 머지않았다는 느낌이 드는 요즈음이다. 확실히 올해는 예년과는 다른 모습이다. 무엇보다 거리의 한가위 현수막이 줄거나 거의 보이지 않는다. 향우회나 청년회 명의의 혹은 누구누구 의원이니 무슨 장이니 하는 이들이 내건 현수막이 골목마다 걸려 한가위의 분위기를 한껏 띄워주곤 했는데 그마저도 사라져 오히려 세시(歲時, observance)의
여론
충대신문
2020.09.23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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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자전 신철규 지구 속은 눈물로 가득차 있다타워팰리스 근처빈민촌에 사는 아이들의 인터뷰반에서 유일하게생일잔치에 초대받지 못한 아이는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타워팰리스 근처를 둘러싸고 있는낮은 무허가 건물들초대받지 못한 자들의 식탁그녀는 사과를 매만지며오래된 추방을 떠올린다그녀는 조심조심 사과를 깎는다자전의 기울기만큼사과를 기울인다칼을 잡은 손에 힘을 준다속살을 파고드는 칼날아이는 텅 빈 접시에먹고 싶은 음식의 이름을손가락에 물을 묻혀하나씩 적는다사과를 한 바퀴 돌릴 때마다끊어질 듯 말 듯사과 껍질그녀의 눈동자는우물처럼 검고 맑고
여론
충대신문
2020.09.23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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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섭리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새로운 계절을 불러들이고 있다. 어느 새 풀벌레 우는 소리가 매미의 날개 짓을 밀어내고 밤공기를 지배하더니 어느 틈엔가 끈적거리는 공기는 청량한 기운을 품었다. 유례없이 길었던 장마와 거듭해 퍼지는 코로나19로 월하의 탁족(濯足)이든 독작(獨酌)이든 한여름 밤의 정취는 언감생심이었고, 일상의 여유는 마음에서, 거리에서 멀리 벗어나 버렸다. 먼 훗날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2020년 여름은 그야말로 감염에서 자유롭지 않은 시간이 끊임없이 이어진 긴장과 긴박의 연속이었을 것이고, 또 어떤 이에게는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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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대신문
2020.09.02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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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이제니매일매일 슬픈 것을 본다. 매일매일 얼굴을 씻는다. 모르는 사이 피어나는 꽃. 나는 꽃을 모르고 꽃도 나를 모르겠지. 우리는 우리만의 입술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만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 모르는 사이 사라지는 꽃. 꽃들은 자꾸만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그 거리에서 너는 희미하게 서 있었다. 감정이 있는 무언가가 될 때까지. 굳건함이란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인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오래오래 믿는다는 뜻인가. 꽃이 있던 자리에는 무성한 녹색의 잎.
여론
충대신문
2020.09.02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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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동자허수경 죽은 이들 봄 무렵이면 돌아와 혼자 들판을 걷다 새로 돋은 작은 풀의 몸을 만지면서 죽은 이들의 눈동자 자꾸자꾸 풀의 푸른 피부 속으로 들어가다 마치 숲이 커다란 눈동자 하나가 되어 그 눈동자 커다란 검은 호수가 되어 검은 호수가 작은 풀끝이 되어 나를 자꾸 바라보고 있는데 내버려두었다네, 죽은 이들이 자꾸 나를 바라보는데, 그것도 나의 생애였는데 그 숲에는 작은 나무 집이 하나 있었다 집 앞 닫혀진 문 앞까지 걸어갔다 집 안은 아직 겨울이었고 결혼 대신 시를 신랑 삼았던 여성 시인이 있었다 시인의 저녁 식사에 올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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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대신문
2020.06.03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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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이름 붙여진 신종 바이러스에 의한 팬데믹은 기어이 비정상을 정상으로 만드는 시대를 불러오고 말았다. 어느새 사회 곳곳에서 일회용품 사용이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지고, 밤늦은 시간 엘레베이터 안에서의 마스크 착용마저 에티켓이 되었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가 부딪히면서 해묵은 갈등은 더욱 날카로워졌고, 크고 작은 다툼은 늘어만 가고 있다. 2019년 12월 세계 최초로 보고된 후 반년이 지나고 있는 지금 코로나19는 팬데믹이 되어 전 세계를 그야말로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 중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벌써 코로나19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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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대신문
2020.06.03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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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밝았다. 365일을 한 해로 묶어 끝내고 다시 시작하는 주기(週期)가 있다는 것은 유용한 일이다. 다시 시작은 각오를 새로 다지는 시간을 주고, 끝은 성취를 만끽하고 회고하고 쉬는 시간을 준다. 2020년은 윤년(閏年, leap year)이다. 태양력으로는 4년마다 한 번 2월에 평년의 28일보다 하루가 더 있어 29일이며, 태음력으로는 19년에 일곱 번 윤사월이라 하여 4월이 한 번 더 있다. 덤이라고 할까. 우리나라에는 “윤년 윤달에는 송장을 거꾸로 매달아 놓아도 탈이 없다.”라는 말이 있다. 윤달은 하늘과 땅의 신이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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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대신문
2020.01.07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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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이성부기다리지 않아도 오고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어디 뻘밭 구석이거나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기웃거리다가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지쳐 나자빠져 있다가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흔들어 깨우면눈 비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너를 보면 눈부셔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1942년 광주(光州) 출신 이성부 시인은 1959년 고교 재학 중『전남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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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대신문
2020.01.07 1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