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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 일병 5호봉, 나는 추위에 얼어버린 연병장에 주저앉았다. 주위의 간부들과 동료들이 소총을 내려놓고 내게 모여들었다. 연신 말뚝을 내리치던 오함마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졌다. 애당초 나는 현역병으로 입대할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아홉 살 때 왕복 4차선을 무단으로 건너다 사고를 당했다. 그때 나는 죽지 않은 것이 기적이었다. 시속 80킬로로 달리던 승용차가 저만치서 앞만 보며 달려오는 나를 발견하곤 황급히 속도를 줄이고 핸들을 튼 덕분이었다. 오른쪽 정강이가 두 동강 났고 타이어가 쓸고 지나간 살갗 틈새로 허연 정강이뼈
여론
충대신문
2023.10.17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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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나라 안팎으로 시끄럽다. TV나 신문 등 각종 언론 매체들은 쉴 새 없이 새로운 뉴스와 이슈들을 쏟아내면서 국민들을 반반으로 갈라 싸우게 유도하는 것이 이제는 일상으로 자리잡았다. 8월 내내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방출 문제로 처리수니 오염수니 하는 논쟁에서 불붙더니 과학적이라느니 괴담이라느니 하면서 남녀가 노소가 동서가 갈라져 싸우는 형국이다. 결국 한미일 정상회담 이후, 일본 정부는 8월 24일부터 전 인류적 고민거리인 오염수를 방류하기 시작했다. 지난 6월에는 킬러 문항이라는 낯설은 단어가 유행이었다. 정부는 공교육 정상
여론
충대신문
2023.09.08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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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방학 동안(물론 대학원생에게는 방학이 없다) 생전 처음으로 수영을 배우러 다니기 시작했다. 추석 연휴에 친구들과 LA 여행을 가기로 했는데, 3년 만에 떠나는 해외 여행을 충분히 즐기고 싶기 때문이다. 거제도에서 나고 자란 아빠는 할머니댁에 갈 때마다 나와 동생을 바다에 띄워서 앞으로 나아가게 하려고 애썼지만 30년간 성공하지 못했다. 아빠는 친구들과 물속의 꽃게를 잡아 망태기에 넣고 고둥을 건져 올리며 헤엄치는 법을 자연스럽게 체득했기 때문인지 가르치는 데는 별로 소질이 없었던 것 같다. 올해는 아침부터 기온이 30도를 넘나
여론
충대신문
2023.09.08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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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숫자들이 빠짐없이 옛것이 되었다. 이달의 태양은 저녁의 시간까지 훔쳐가며 마음껏 열기를 발산한 후에도 미련이 남아 잠 못 이루는 열대야를 남겨두며 여전한 심술을 부린다. 마치 자신의 존재감을 절약하는 방법을 잊은 듯이. 이 계절이 품은 욕심의 수명이 다한 후에는 때를 기다렸던 동장군이 이내 나타나 으름장을 놓겠지만 나는 그 시간의 도래를 기꺼이 반길 것이다. 여름은 내게 그렇게나 버겁다. 반갑지 않은 뜻밖의 손님처럼. 또 여름은 그토록 고약하다. 플레이리스트를 채운 지나간 인연을 그리는 노래와 후회와 자책으로 점철된 목소리들
여론
충대신문
2023.09.08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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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속했던 면접 스터디 그룹은 8명 중 3명이 C 대기업의 최종 면접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모였다가 각자 강의를 듣고 과제를 하고 다시 밤 8시부터 모여 연습한 덕인지 우리 그룹은 서로를 알게 된 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스스럼없는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가까워졌다. “당신의 한국사 지식을 C사에서 일하는데 어떻게 활용하시겠습니까” 같은 당황스러운 예상 질문에 꼿꼿한 자세로 순발력과 민첩성을 발휘하여 답한 우리는 긴장이 탁 풀어진 채 늦은 밤 강의실 의자에 널부러져 있었다. “근데 취업은 XX(남성
여론
충대신문
2023.06.01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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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유롭게” 살고 있는가? 우리에게 자유란 무엇인가? 우리가 갈망하는 자유는 무엇인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자유란 것은 기본적으로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자유는 양심이나 사상의 자유 그리고 이동의 자유를 의미하는 개인적 자유로부터, 영적 구원을 의미하거나 숭배의 자유를 의미하는 종교적 자유, 정부의 침해에 맞서 개인의 신체와 재산을 보호할 수 있는 시민적 자유, 집회와 결사 및 언론의 자유 그리고 국가적 의사 결정에 참여할 자유 같은
여론
충대신문
2023.06.01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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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말랐다. 바싹. 어렸을 땐 생화를 사는 게 이해가지 않았다. 가성비도 나쁘고 영원하지 않았다. 상실에 대한 저어감이기도 하겠지만, 꽃을 잘 몰랐다. 생화와 조화를 잘 구분하지 못했다. 월초에 사둔 꽃다발이 있었다. 화병에 뒀다, 물을 갈았다가, 줄기 끝을 사선으로 잘라주었다가. 하늘을 향하던 꽃은 며칠 버티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화병에서 꺼냈다. 보기 좋게 줄기끼리 묶어주었다. 바람이 잘 드는 곳에 거꾸로 매달아 두 주를 바싹 말렸다. 목이 꺾이지 않았다. 마지막 수분은 꽃잎에서 증발했을 것이다. 한 사연에서 끝은 어디
여론
충대신문
2023.06.01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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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년보다 이르게 피고 진 벚꽃을 본다. 분분 날린 꽃 진 자리에 솟아나는 연둣빛 잎새가 신비롭고도 아린 사월이다. 시인 엘리어트에게 사월은 황무지와 같은 잔인한 달이었듯 9년 전 나의 사월도 고통스러웠다. 진도 앞바다에 세월호가 가라앉은 광경이 또렷하게 떠오른다. 오전 강의를 준비하는 중에 듣게 된 비보는 충격이었고, 마음 졸이던 그날부터 속보로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일상을 흔들었다. 학생들과 함께 가기로 한 현장 학습을 미루었고, 크게 웃거나 즐겁다고 말하는 것이 이유도 모른 채 떠나간 생명들에게 미안했다. 강의 때 입으려 마련했던
여론
충대신문
2023.04.20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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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동료들 사이에서 단연 화제에 오른 것은 드라마 ‘더 글로리’ 시즌 2였다. TV에서 틀어주는 편성표대로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을 관람하던 때와 달리 유튜브와 같은 온라인 동영상 사이트, OTT 서비스 등 다양한 플랫폼에서 각자의 취향에 맞는 영상을 관람하는 요즘, 특정 콘텐츠를 보지 않으면 대화에 낄 수 없다는 이야기가 오랜만에 돌았다. 지상파, 케이블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달리 원하는 시간에 한꺼번에 몰아보기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더 글로리’ 시즌 2가 상영되기 시작한 주의 주말은 드라마를 보느라 밤을 새웠다는 이야기를 어렵
여론
충대신문
2023.04.20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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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퍼스트 슬램덩크》 중심으로― 만화 『슬램덩크』는 가슴을 울리는 작품이다. 북산고 농구부의 투지를 그린 내용인데, 인물들이 입체적으로 스토리를 풀어낸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그런 원작을 잘 계승한 작품이다. 잘 만들었기에 영화가 올해 2분기가 넘도록 상영 중이다. 화려한 연출, 성우의 연기, 이야기의 구성 등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것이 없다. 기호는 있겠지만 관객이 감동하기엔 충분한 구성이다. 원작과 영화가 다른 점도 있다. 꼽자면 새 이야기의 삽입을 짚을 수 있다. 경기 중간중간 플래시백으로 전해지는 송태섭(미야기 료타
여론
충대신문
2023.04.20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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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대학교의 캠퍼스도 겨울방학을 뒤로 하고 다시 2023년 봄 학기 개강을 했다. 바로 얼마 전인 2월 24일에 2022학년도 전기 학위수여식을 개최해 그동안 형설지공의 학업을 연마한 3,500여 명의 졸업생들을 떠나보냈다. 곧이어 지난 2월 28일 입학식을 통하여 5,000여명의 신입생들을 맞아들였다. 이제 캠퍼스는 강의실과 도서관에 바삐 오가며 학문적 열정을 불태우고 다른 한편으로 동료, 선후배들과 삼삼오오 함께 어울리는 학생들로 활기를 더해가고 있다. 물론, 대학본부의 교직원과 교수들 모두 새로운 준비와 각오로 새 학기 강의
여론
충대신문
2023.03.03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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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 방의 온도는 16도이다. 어제도 그제도 난방을 켜지 않았다. 1월에는 14도로도 살았는데, 지난 주말에 아주 오랜 친구가 집에서 하룻밤 자고 간다기에 보일러를 팽팽 돌렸더니 그나마 아직까지 2도가 올라가 있다. 다들 춥지 않냐고 묻지만 두껍게 입으면 그럭저럭 지낼만하다. 원룸인 내 집 1월의 도시가스 난방비는 사만 얼마가 나왔다. 휴. 춥게 지낸 보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추위를 많이 타는 한 친구는 역시 원룸에 지내는데 난방비가 11만 원 나왔다고 울상이 됐다. 월급이 190만 원인데, 월세가 37만 원 관리비가 3만 원
여론
충대신문
2023.03.03 1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