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하는 대학원생

  ―《더 퍼스트 슬램덩크》 중심으로―

  만화 『슬램덩크』는 가슴을 울리는 작품이다. 북산고 농구부의 투지를 그린 내용인데, 인물들이 입체적으로 스토리를 풀어낸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그런 원작을 잘 계승한 작품이다. 잘 만들었기에 영화가 올해 2분기가 넘도록 상영 중이다. 화려한 연출, 성우의 연기, 이야기의 구성 등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것이 없다. 기호는 있겠지만 관객이 감동하기엔 충분한 구성이다.

  원작과 영화가 다른 점도 있다. 꼽자면 새 이야기의 삽입을 짚을 수 있다. 경기 중간중간 플래시백으로 전해지는 송태섭(미야기 료타)의 과거다. 작가가 원작에서 미처 다 하지 못했던 목소리를 담으려는 리메이크로 보인다. 그 목소리는 “포기하면 그 순간이 시합 종료”라며 삶의 파이팅을 권함과 함께, ‘날 되살아나게’하기 위한 외상 후 성장을 더 노골적으로 말하는 듯하다.

  외상 후 성장은 상처받은 이들이 마음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것을 넘어 ‘성장’에까지 이르는 것(한창수, 2020)을 뜻한다. 긍정적인 심리 변화로 한때 상처였던 것이 지금을 더 이롭게 하는 것이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송태섭은 과거에 죽음을 여럿 겪는다. 죽음은 곧 슬픔이고, 슬픔은 매우 강렬한 감정이다. 태섭은 죽음으로 비어진 자리를 채우려고 고군분투하지만 줄곧 좌절한다. 이 상황을 태섭과 남은 가족은 제대로 수용하지 못한다. 덮어두고 회피한다. 빅터 플랭클은 죽음과 고통 없이는 인간의 삶이 완성될 수 없다고 했지만 그것 받아들일 힘이 누구에게나 항상 있는 건 아니다.

  “느끼지 못하는 감정은 치유할 수 없다”(데이비드 케슬러, 2020)는 말처럼, 완전히 느끼며 소화해내기 전까지 충분히 슬픔을 느끼는 시간이 필요하다. 치유와 회복, 그리고 성장은 슬픔의 시간 이후에야 찾아온다. 태섭은 농구로 그 시간을 채운다. 태섭이 농구라는 매개체에 밀착돼 있는 것은, 당장은 해결하지 못한 슬픔을 농구에 묻어둔 까닭이다. 그래서 “태섭이 끌어안고 있는 건 쭉 혼자서만 끌어안고 있던 것”이란 저자의 말도 감내의 시간으로 읽힌다.

  태섭은 도망 다녔던 감정을 몸소 다 마주한 뒤에야 과업을 완수해낸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심장이 쿵쾅거려도…. 이를 악물고 잘난 척을 한다”는 말은 그 어떤 역경도 버텨내리란 의지기도 했다. 경기에 도달해선 상대팀인 ‘최강 산왕’을 이긴다는 투지. 그것은 고통의 의미가, ‘살아 있는 나’에게 있다는 것을 체화하고 나서야 도달할 수 있는 화살표이다.

  그렇게 영화 후반부에서 태섭은 성장한다. 죽음, 슬픔을 회피하지 않았다. 경기의 승부를 다른 멤버에게 기대지 않는다. 단신인 자신이 집중마크(올 코트 프레스) 당하는 불리한 경기 상황에서 혼자만의 힘으로 돌파해낸다. 경기가 풀리기 시작한다. 위기대처능력은 피하거나 기대는 게 아니라 마주하는데서 생겨났다.

  우리는 아픔을 감당하지 못할 때가 많다. 이후 감정은 계속해서 나를 괴롭힌다. 외상 후 성장이라는 말이 아름다운 건 상처가 무저갱이 아니라 디딤돌일 수 있다는 증명에 있다. 『슬램덩크』는 반복되는 좌절에서도 디딤돌을 찾아내는 열정과 갈망을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포기했을 때 편해지는 건 통증이지 심정이 아니다. 작은 것부터 하나씩 마주해보자. 영화에서 승리를 장식한 것은 화려한 덩크슛이 아니라 기본인 골밑슛이었다. 골이 들어갈 때마다 삶은 되살아날 것이다. 몇 번이라도. 태섭처럼 “다녀왔어요”하고서 웃음을 되찾을 수 있을 때까지.

  * 슬램덩크 만화(신장재편판, 2018), 영화(더 퍼스트 슬램덩크, 2022), 슬램덩크 리소스북(2023) 등에서의 발췌는 괄호 없는 따옴표로 표시함.

 

최동호 (상담교육 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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