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예년보다 이르게 피고 진 벚꽃을 본다. 분분 날린 꽃 진 자리에 솟아나는 연둣빛 잎새가 신비롭고도 아린 사월이다. 시인 엘리어트에게 사월은 황무지와 같은 잔인한 달이었듯 9년 전 나의 사월도 고통스러웠다. 진도 앞바다에 세월호가 가라앉은 광경이 또렷하게 떠오른다. 오전 강의를 준비하는 중에 듣게 된 비보는 충격이었고, 마음 졸이던 그날부터 속보로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일상을 흔들었다. 학생들과 함께 가기로 한 현장 학습을 미루었고, 크게 웃거나 즐겁다고 말하는 것이 이유도 모른 채 떠나간 생명들에게 미안했다. 강의 때 입으려 마련했던 밝은 색 옷은 검은 무채색옷으로 바뀌었다. 그렇게라도 하는 것이 봄날 꿈꾸며 배에 올랐을 그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 생각했다.

  사회적 재난이 일어났을 때 충격은 컸고 문제의 원인을 찾기 위해 다양한 목소리가 들끓었다. 그러나 우리는 세월호 참사의 실체에 다가가지 못했고 대책은 미흡했다. 2022년 일어나지 않았어야 할 10‧29 참사가 또다시 반복되었다. 우리는 결국 세월호 참사로부터 크게 배우지 못했고, 안전한 사회로 더 나아가지 못했다.

  큰 사회적 사건을 대할 때면 하인리히 법칙이 떠오른다. ‘1:29:300’ 법칙으로도 불리는 이것은 하인리히가 펴낸 1931년 『산업재해 예방의 과학적 접근』이라는 책에 소개된 개념이다. 하인리히는 7만5천 건 이상의 산업재해를 분석하면서 한 가지 원리를 발견한다. 어떤 대형 참사가 발생하기 전에 같은 원인으로 수차례 경미한 사고와 수백 번의 징후가 반드시 나타난다는 통계적 원칙이다. 바꾸어 말하면, 1명의 사망자가 발생할 때 그 전에 같은 원인으로 29명의 경상자가 발생하고, 같은 원인으로 이전에 다칠 뻔한 잠재적 부상자가 300명 있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숫자 자체보다는 대부분의 참사가 일어나기 전에 미리 예방할 수 있었음에도 수정하거나 대책을 세우지 않고 무시했다는 점이다. 큰 사고와 재난은 작은 사고가 연쇄적인 사고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막지 못해 일어난 인재인 것이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사고와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1997년의 IMF 위기, 2008년 금융위기, 세월호와 10‧29 참사는 수백 번 나타난 징후들을 살피지 않아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들이다.

  2023년 봄, 우리 사회 여러 곳에서 불안한 신호들이 감지된다. 혐오와 차별로 인한 사회 분열, 코로나19 이후의 경제적 빈곤과 불평등이 심해지고 있다. 논쟁과 협의를 거치는 않은 설익은 정책과 타자를 인정하지 않는 배제의 언어가 넘쳐나고, 노동현장에서의 사망도 끊이지 않고 있다. 사회적 약자들이 기댈 수 있는 안전망은 점점 더 사라지고 있다. 건물과 배와 다리의 문제를 넘어 공동체의 균열과 붕괴가 더 위험할지도 모른다. 위험의 조짐들과 구조해달라는 시그널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비극적인 일을 다시 겪게 될지도 모른다.

  생명은 책임지는 일이다. 이 땅의 모든 존재가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해 참담했던 사건들이 우리에게 준 절박했던 신호를 놓쳐서는 안 된다. 무해한 죽음에 대한 진정한 애도가 그 시작이다. 일어난 사건들의 실체를 밝히는 엄정한 규명 과정과 그 원인에 대한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예방과 대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안전 감수성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와 토론과 숙의가 이루어지는 사회적 공론장을 회복해야 한다. 기본일수록 지켜야 그다음으로 이어갈 수 있다. 공공성을 확보해 나가는 연대가 평화이고 희망이다. 사월이 더는 잔인하지 않도록 아름답고 슬픈 그 생명들을 위한 깊은 다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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