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문화권에서는 임금이나 연장자가 생전에 쓰던 이름을 ‘휘’라고 불렀다. 휘는 높은 사람의 이름이었기 때문에 함부로 부를 수 없어 되도록 사용하는 것을 피했는데, 이러한 관습을 피휘라고 일컫는다.
  피휘가 처음으로 시작된 시기는 주나라 때로 보고 있으며, 중국의 봉건 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이 관습은 쭉 유지됐다. 한반도에는 언제부터 피휘가 들어왔는지 불명확하지만 최소 신라 후기로 추정된다. 일본은 집안 대대로 이름에 특정 글자를 넣는 문화가 있어, 피휘가 정착하지 못했다.
  피휘는 무척 엄격히 행해졌다. 금나라 시절 과거 시험 답안지에 이미 훙서한 황제의 이름을 적었다고 낙방한 사례는 예삿일이며, 심하게는 국호나 성씨를 바꾸는 경우도 있었다. 게다가 정말 단속이 심하면 독음이 똑같거나 유사한 것은 물론이고 모양이 비슷해도 피휘를 할 수밖에 없었다.
  피휘가 생기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이것은 이름을 소중히 여긴 풍습에서 기인한다. 전근대 사람들은 성인이 된 사람의 이름을 입에 담으면 실례라 생각했다. 그래서 성인식을 치룬 사람은 본명 외에 따로 자(字)라는 별명을 지었다. 예외적으로 윗사람은 아랫사람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지만 주군이나 성현의 이름은 함부로 부르지 못했다. 그들에게 존경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연유로 시작된 피휘는 점차 그 범위가 시호와 연호로 넓혀졌다.
  다만 피휘는 무조건 높은 사람의 이름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으며 항상 존경의 의미만 담지 않았다. 연산군 대의 환관이었던 김처선이 연산군에게 간언했다는 이유로 그의 이름인 ‘처’와 ‘선’은 사용이 금지되면서 궁중 무용인 처용무는 한때 풍두무로 개명됐다. 이처럼 피휘는 직위를 막론하고 존경뿐만 아니라 증오와 경멸의 목적으로 쓰이기도 했다.
  피휘는 결자, 결필, 개자, 경독 등 여러 방식으로 거행됐다. 먼저 결자는 글자 하나를 온전히 생략하는 방법이다. 예컨대 사보살 중 하나인 관세음보살은 당태종의 휘인 세민과 겹친다는 이유로 관음보살로 불리게 됐고 이것이 현재도 관습적으로 남아 있다. 결필은 획 하나를 지우는 것이다. 일례로 중국 오악 중 하나인 항산(恒山)은 송진종의 휘인 항과 겹쳐서 마지막 획을 뺀 ‘ 恒山’으로 고쳐졌다. 개자는 뜻이 일맥상통하는 글자로 대체하는 방법이다. 계칩이라는 날은 한경제의 휘인 계(啓)가 들어 있어, 비슷한 뜻을 가진 글자로 대신했다. 이때 바뀐 명칭은 오늘날까지도 변하지 않았는데 그게 바로 24절기 중 하나인 경칩이다. 마지막으로 경독은 글자를 그대로 쓰되 독음을 다르게 하는 것이다. 옛사람들은 경전을 읽다 공자의 휘인 구(丘)가 나온다면 이를 그대로 발음하지 않고 모(某)라고 읽었다.
  피휘로 여러 번거로움이 생기자, 통치자들은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 냈다. 장차 왕이 될 수 있는 자식들의 이름을 실생활에서 잘 쓰이지 않는 벽자, 그것도 외자로 지은 것이다.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조선 세종과 정조의 본명이 외자인 이유도 이 때문이다. 심지어 조선 태조는 조선을 건국한 뒤 ‘성계’에서 ‘단’으로 개명했다. 그렇지만 조선 태종은 그대로 ‘방원’이란 이름을 고수했는데, 이처럼 휘가 두 글자로 이뤄졌다면 오직 한 글자만 피하면 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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