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처럼 - '5.18부상자 동지회' 박병률씨의 꿋꿋한 삶

  "검찰의 5ㆍ18불기소처분은 여전히 반성없이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입니다. 공권력이 국민의 생명을 함부로 짓밟은데 대한 법적 장치를 반드시 마련해야 합니다."
  현재 명동성당앞에서는 80년 5월당시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학살자처벌을 위한 서명운동을 벌이며 외롭게 투쟁하고 있다. 그 가운데 15년을 한결같이 투쟁한 박병률씨는 '5ㆍ18 부상자동지회'의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광주항쟁당시 박씨는 공수부대의 무차별난사에 짐승처럼 처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투사회보'제작에 힘을 기울였다고 한다. '투사회보'는 신문발간이 정지된 당시에 서민들의 행동 지침역할을 담당한 신문이다.
  "공수부대원들에게 맞아 콩팥이 부서지고, 정수리가 함몰되었습니다. 저와 같이 싸우던 동지들은 다 죽었는데, 다행히 저는 빨리 병원으로 후송되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죠. 아마 하느님이 끝까지 투쟁하라고 두번 살려준 걸 껍니다."라는 박씨의 말에는 죽은 동지들에 대한 가슴아픈 회상과 함께, 그들을 대신해 살고자 하는 뜨거운 열의가 엿보였다.
  그러나, 15년간의 외로운 투쟁에서 박씨를 포함한 광주시민들이 봉착한 문제는 경제적 위기였다고 한다. 어려운 경제상황을 빌미로 정부는 올바른 진상규명도 없이 보상금을 지급했고, 이로 인해 5ㆍ18진상규명사업이 축소화되어 갔으며 이 과정이 가장 가슴아팠다고 한다.
  "세상에 태어나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아내입니다. 힘든 표정 한번없이 지혜와 온화함으로 저를 이끌어 준 아내는 살아있는 천사입니다."라며 말을 잇지 못하는 박씨는 아내얘기만 하면 눈물이 난다며 이미 흘러내린 눈물을 닦는다. 교직에 몸담고 있는 아내는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활동덕에 교육위원회의 징계조차 감수해야했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훌륭한 내조를 잊지 않아 자신이 6남매중 경제력없는 장남임에도 불구하고 집안문제도 부딪힘없이 해결했다고 한다.
  8살, 6살인 두 아이도 구김없이 밝게 자라 담임선생님이 아버지의 직업이라도 물으면 "선생님은 민주시민이 아닌가 봐요? 우리아빠를 모르세요? 우리아빠는 투쟁하는 분이에요."라고 자랑스럽게 대답한다고.
  "5ㆍ18불기소처분의 잘못을 인식하고 이를 타개하려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물론, 서명운동에 시민들의 호응또한 높습니다."
  5ㆍ18광주문제는 국민적인 인식과 공감대의 확대를 통해 우리스스로 해결해야할 역사적, 도덕적 책임이다. 진상규명은 커녕 처벌초자 백지화된 지금, 학살정권아래 희생된 이들의 한이 풀릴 날은 도대체 언제일까 궁금하기만 하다.

 김혜령 기자

저작권자 © 충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