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주선 그리기

  요즘은 무얼 듣고 보든, 모두 '실패'의 이야기로 읽힌다. 방영된 지 한참 지난 두 드라마 시리즈 <콩트가 시작된다>(2021)와 <플리백>(2019)이 그렇다. 각각 다른 시기에 접한 두 개의 이야기는 시간이 꽤 흘렀지만, 최근까지도 나를 붙잡고 있다.

  <콩트가 시작된다>는 세 친구의 한 시절을 마무리하는 과정을 그린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결성된 세 친구의 콩트 모임은 10년간 지속되며 이어진다. 그러나 이렇다 한 결과나 성공 없이 현실로 돌아와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그들은 계속해서 콩트를 하며 꿈을 좇을 것인지, 현실에 발붙이고 살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제각각의 이유로 제각각의 시절에 인사를 고하는 시간은 퍽 감동적이다.그러나 이쯤 되면 너무나 단순한 도식에 흥미를 잃게 된다. 콩트, 즉 코미디언이라는 어려운 직업을 택했고 진학으로 시작해 취직, 결혼으로 이어지는 통상적인 생애주기를 따르지 않았다고 해서 이들의 10년을 실패라고 단정지어도 되는 것일까?

  곰곰이 따져보면 이들은 단 한 번도 현실과 동떨어진 채 그 '현실'이라는 것과 대비되는 '꿈'을 좇으며 현실감을 잃어본 적 없다. 공사장에서 일하고 이자카야에서 꼬치를 구우며, 대본을 쓰고 대사를 연습했다. 그들의 마무리가 '실패를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아름다운 청년들의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이 못내 못마땅한 이유이다.그들의 실패와 그들을 응원하던 주변인들의 실패 -직장 내 따돌림으로 인한 퇴직, 불법 다단계 피해로 인한 실직- 역시 누구보다 성실히 살았던 이들의 예기치 못한 사고에 불과하다. 여기서 나는 시련은 더 깊은 세계와 넓은 시야를 갖게 해준다거나 자기 자신을 지키고 돌보는 행위 역시 중요한 덕목이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그저 나는 철저히 자신의 잘못으로 망가진, 다른 의미로 완전히 실패한 사람의 이야기를 보고 싶을 뿐이다.

  <플리백>의 '플리백'이 그런 인물이다. 철저히 자기 잘못으로 삶을 망가뜨린. 그런데 망가진 삶을 어찌저찌 잘 굴려보는, 실패와 동고동락하는 사람. <플리백>은 2013년 퍼비 월러 브릿지의 1인극으로 이후에 두 시즌의 TV 드라마로 제작됐다. 피비 월러 브릿지는 원작자이자 배우로서 주인공 '플리백'을 연기한다. <플리백>의 포스터는 꽤 강렬한데, 그 단어 뜻과 같이 '수치스럽고 혐오스러운 사람'의 표정과 행색을 한 플리백이 제4의 벽을 뚫고 관객을 쳐다본다. 그 눈빛에는 비참과 슬픔이 서려 있는 것만 같다. 그녀가 그런 슬픈 눈을 갖게 된 이유는 전적으로 모두 그녀의 탓이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상실감에 빠져있는 플리백에게 큰 도움이 되어주었던 친구에게 플리백은 상처를 입힌다. 친구는 충격을 안고 차도를 걷다 사고를 당한 뒤 세상을 떠난다. 가까운 이들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플리백의 삶은 어쩌면 그 자체로 실패다. 아버지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맞는 구석이라곤 없는 자매와의 관계는 연신 삐그덕대며, '헤픈' 관계를 통해 자신의 쓸모를 찾으려 한다. 그런데도 나는 이 플리백의 슬픈 눈이, 자꾸만 마주치는 흔들리는 눈동자가 어쩐지 계속해서 눈에 밟힌다.

  세계의 합리성에 걸맞지 않은 사람으로서, 무수한 실패와 동고동락하며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뭘까. 계속 슬퍼하고 계속 무능하고 계속 제멋대로인 인물들에 마음이 기울게 되는 것은 나 역시 이 세계에서 필패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필패할 수밖에 없는 세계에서 모호함과 애매함을 견디는 방식으로 균열을 내고 그곳에 거주하고 싶다. 그런 마을에 역시 무능한, 진절머리 나는 인물들과 함께 있고 싶다.

김수정 (국어국문학·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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