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의 집 전화 번호는?

  소설부문

  이선호(경제ㆍ4)

  K는 분명 당황하고 있었다. 머리를 숙인채 허둥대며 연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는 K의 모습은 가히 코메디의 한 장면을 연출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K가 바둥대며 고개를 숙일때마다 작은 실내포장마차에서는 폭소가 터져나왔다.
  『조심해, 젊은 사람이 말이야, 사리분별을 할 줄도 몰라?』
  『죄송합니다. 조심하겠습니다.』
  얼굴엔 기름기가 잘잘 흐르고 임산부처럼 배나온 사내 앞에 K는 여전히 굽실거리며 어쩔줄을 몰라한다. 사내는 옆구리에 양손을 올린채 사내의 동료들을 힐끗 바라보며 이만하면 체면은 섰지않느냐는듯 어깨를 으쓱한다. 그는 K를 향하여 다시 입을 연다.
  『그럼 가보슈. 다시는 당신같은 사람, 얼굴 좀 안봤으면 좋겠어. 사람이 무슨 염치가 있어야 할 거 아냐. 염치가. 무릎 꿇고 사과해도 모자랄 판인데 도리어 화를 내다니ㆍㆍㆍ쯧쯔, 내 당신 생각해서 세탁비 청구는 않을테니 그냥 가보슈. 당신 오늘운이 좋은 걸로 생각해야 한다!』
  『예,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K는 부동자세에서 직각에 가까운 모습으로 허리를 꺾으며 인사를 한다. 그 모양이 그다지 나쁘게 보이지 않았는지 사내와 그의 일행들은 흡족한 박장대소를 한다.
  K는 급히 계산을 마치고 포장문을 밀쳐 거리로 나섰다. 조금 열려진 그 틈새로 사내들의 한바탕 웃음이 쓸려 나왔다. K는 견딜 수 없이 수치스러워진다. K는 달음박질을 친다. 아무도 뒤쫓는 이가 없건만 멈출줄 모르고 달린다. 첫번째 모퉁이를 겨우 돌아 한적한 담벼락을 마주대해서야 K는 멈춘다.
  K는 눈물이 핑 돌았다. 도대체 무얼그리 큰 잘못을 저질렀단 말인가. 울적한 기분에 술을 마시고 싶었고, 엉겁결에 주인 아주머니가 내미는 뜨거운 찌게남비를 받으려다 국물이 약간 튀였을 뿐인데ㆍㆍㆍ그래서 K는 진실로 미안함을 느끼면서 정중히 사과하려 했지 않은가 말이다. 그래, 어쩌면 그들은 애시당초 사과따위에는 안중에도 없었는지 몰라. 생각해 보라지! 요즈음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조그마한 시비 끝에도 칼부림이지 사람죽이기를 파리목숨보다 가볍게 하지 신문이란 신문의 사회면은 살인ㆍ강간ㆍ폭력으로 발디딜 틈이 없이 않는가. 이 정도면 다행이지, 정말 다행이고 말고. 길다가 전봇대에 부딪쳤다 생각하면 그만이지 뭘ㆍㆍㆍ.
  K는 담벼락 아래 널려진 블럭 위에 앉아있다. 바람은 비좁은 모서리를 돌아 K가 앉아 있는 골목으로 파고드느라고 칼바람이 되어 불어왔다. 눈자위가 쓰리고 아파왔다. 원숭이 다루듯 하려는 그들에게 K가 항변한 것이 잘못된 일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발육상태가 양호한 편에다 게다가 숫자상 일곱이나 되었지 않은가. K는 재빨리 단념할줄 알았다. 그것은 오래전부터 K의 몸에 배인 습성이기도 하였다. 비록 큰주먹으로 얼굴의 눈주위를 가격당한 후였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다행이지 다행이지.
  K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눈두덩을 만져 보았다. 욱씬욱씬거리는 통증이 신경을 타고 감지된다. 상당히 부어올라있었다. 시퍼렇게 멍들어 있을 것 같았다. K는 한숨에 섞어 다시 「다행이야」하고 중얼거린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스스로 소시민이었다.
  K는 집으로 돌아갈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아니 돌아갈 수가 없었다. 이렇게 멍자국을 안고 아내에게 무슨 설명을ㆍㆍㆍㆍ.
  K는 지금 그의 집으로 이어지는 골목입구, 그러니까 차량을 이용해서 당도할 수 있는 최대한의 지점에 서 있다.
  해정약국과 장수정육점이 엇비슷하게 마주보고 있고 큰도로로 연결되어 있는 곳의 가장자리는 쓰레기더미가 쌓여 있는데 두가게와 이 공터가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K에게 있어 추억이란 그저 좋았던 날들의 기억 정도의 의미 밖에 차지하지 않는것이지만, 출퇴근 시간마다 이곳을 지나치면서 그 추억들을 떠올리는 일이야말로 K에게 있어서는 몇 되지 않는 작은 행복이었다.
  K는 아내를 생각한다. 그는 늘 아내에게 대하여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쥐꼬리만한 월급봉투를 내밀어야하는 슬픔도 슬픔이거니와 손가락 끝에 피멍이 맺힌 그녀를 대할 때마다 위로나 사랑의 말 한 마디 해주지못한 슬픔이 K의 가슴을 치는 것이었다.
  아내는 목걸이를 취급하는 회사에서 구슬을 가져다가 일일이 바늘로 구슬을 꿰어 목걸이를 만드는 일을 한다. 목걸이가 하나 완성되면 30원, 하루종일 꿴다해보았자 100개를 넘길까말까 하는데 아내는 열심이었다. K가 「힘들텐데 관두지 그래」하면 아내는 그냥 웃기만 하는 것이었다. 우리 두 식구 반찬값은 되지 않느냐며 해미를 가졌을 때도 일손을 놓지 않았다. 그것이 아내가 K에게 부리는 유일한 고집이었지만 하루종일 불편한 자세로 쭈그리고 앉아있는 일도 일이려니와 밤늦도록까지 일을 하는 아내를 볼 때면 웬지 부화가 치미는 K였다.
  해미를 낳기 얼마전 K는 큰 결심을 하였었다. 출근길에 부기가 낀 푸석푸석한 아내의 얼굴을 대한 것이 못내 걸렸던 것이다. 다른 남편들은 아내가 먹고 싶은 것정도는 다 알아서 챙겨준다던데 그러나 아내는 도무지 K에게 무엇이 먹고 싶다 말할 줄을 몰랐다.
  K는 가불을 신청할까하다 평소 호의의 웃음을 자주 보여주던 L과장에게 부탁해 보기로 하였다. 그런데 L과장은 선뜻 그가 말한 액수의 돈을 꺼내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어허, K씨가 나한테 부탁을 하는 때도 있구먼! 쉽게 생각하면 한없이 쉬워지는 것이 세상살이 아니겠소? 이제사 우리 K씨가 무엇인가 깨달은 것 같은데 앞으로 우리 많이 친해 봅시다. 하하하.
  L은 K에게 악수를 청해왔었다. 돈 몇푼 빌려주면서 별 흰소리 다 하는 군하고 언뜻 생각되었지만 이 얼마나 상사에 대한 불경한 생각이란 말인가. 친절하게도 돈까지 빌려주었는데ㆍㆍㆍ호의를 호의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예의가 아니라는 듯이 K는 황급히 L의 손을 맞잡았었다.
  L은 식곤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도 이제 중년의 나이이다. 그의 연배의 친구들이 웬만한 회사의 부장이나 국장, 하다못해 차장급의 직책을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하면 그의 중소기업체 과장이란 명함은 왜소하기 짝이 없다. 그것이 L이 느끼는 컴플렉스이긴 하였지만 그렇다고 L은 스스로 자신을 격하시키지는 않았다. 남 모르는 자신감이 있는 터였다.
  L은 씀씀이를 넓게함으로써 자신의 컴플렉스를 극복한다. 그러나 아무데나 펑펑 쏟아붇는 것은 아니었다. 적재적소에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대량투하를 하는 것이다.
  오래간만에 만난 고교동창생들과의 술자석이 벌어진 어제 저녁만해도 그렇다.
  L은 앞으로의 거래에 도움이 될만한 위치에 있는 친구들을 이미 파악해놓고 있었다. 그는 그 친구들과 2차를 가는데 성공하였고 투자를 하였다. 그 효과는 이제 조만간 있을 신상품개발건이 끝나면 즉시 발생할 것이다. 그러면 자신도 상무로 승진될지도 모른다.
  L은 흐뭇한 웃음을 흘린다. 자꾸 웃음이 나온다. 그때 그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윽고 K가 들어온다.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무어라 K가 말한다. L은 K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경멸한다. 좀처럼 입을 열지않고 시키는 일은 성실히 수행하는데 도대체 주변머리라고는 없는 친구라고 L은 단정한다.
  그러나 K은 L에게 필요한 존재이다. K는 경리계이기 때문이다. L은 K에게 봉투를 내민다. 악수를 청한다. 머뭇거리던 K의 표정에 스치는 감정을 L은 놓치지 않는다. K는 두번 고개를 숙이고는 조용히 물러간다.
  K는 자리에 앉아 있다. 그는 고민에 빠져있다. 무엇을 사야한단 말인가. 무엇이 아내에게 필요하단 말인가. 그리고 돈의 출처를 아내가 물어보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K는 일손이 잡히지 않았다. K는 사무실 동료들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보약을 한첩 다려주는 것이 최고라네. 기가 허하면 유산할 가능성이 농후하거든. 뱃속의 아이한테도 도움되니 일석이조 아닌감?
  -무슨 소리. 싱싱한 야채나 과일 종류가 적당하이. 우리 마누라는 귤을 제일 좋아했다구! 여자들 얼굴에끼는 기미나 빈혈증세를 보아? 임산부에게는 비타민이나 섬유질 있는 음식이 좋은거야.
  -여기 장가 안가본 사람이 많군 그래. 사골을 푹 고와서 한그릇씩 팍팍 마시게 해보게나. 고단백식품이 장땡일세 장땡ㆍㆍㆍㆍ
  K군 혼란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모든 것들이 아내에게 필요하다는 이야기들 같았다. 「돈이 웬수로군」K는 낮게 중얼거리다 생각을 접어두었다. K는 현재가 소중하되 헛된 망상은 재앙을 부른다는 아버지의 훈계를 가슴에 새기고 있었으므로 그런 의미에서 K는 스스로 합리주의자였다.
  K는 퇴근을 서둘렀다. 집까지 가는 도중에 살펴볼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K의 잘못된 판단이었음을 곧 들어나게 되었는데 K는 어깨를 툭하니 늘어뜨린채 수 없이 많은 곳들을 전전하고 말았던 것이다. 거리의 상점들, 시장, 백화점 등등, 대부분의 마음에 드는 것들이란 그의 주머니로서 해결할 수 없는 허공에 뜬 꽃과 같은 것들이었다.
  K가 퇴근한 이후 많은 시간이 흐른뒤에 K는 집 앞 골목어귀에 서 있었다. 그는 몹시 피곤도 하고 우울하였다.
  그가 아내를 위하여 살 수 있는 물건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K가 서 있는 곳은 상당한 고지대였으므로 쓰레기더미가 쌓인 곳에서 시내쪽을 바라보면 시내의 경관이 한눈에 보였다. K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ㆍㆍㆍㆍㆍ저, 불빛들은 ㆍㆍㆍㆍㆍ왜 저렇게, 무얼 위해서 ㆍㆍㆍㆍㆍ어둠을 밝히는 것일까 ㆍㆍㆍㆍㆍ
  K의 눈에는 멀리 보이는 불빛들이 바람앞의 촛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려 보였다. K는 스스로에게 분노를 느꼈다.
  그날 밤 K는 공터를 배회하며 많은 생각을 하였다. K가 대문도 달려있지 않은 주인집 마당을 지나 그의 방문을 두드렸을때는 이미 자정이 넘어 있었다.
  P는 보던 신문을 접고 일어섰다. 아까부터 수상쩍게도 밖을 맴돌던 사내가 유리문을 밀치고 가게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곤색양복에 넥타이를 단정하게 매었지만 좀 허술해 보인다. 헝클어진 머리, 길쭉한 얼굴, 약간은 말라보이는데 조금 커보이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 같았다. 사내는 불안한 표정으로 눈동자를 굴리며 유리창을 가리킨다. P는 그가 가르키는 곳을 바라본다. 거기에는 며칠 전 모제약회사에서 나온 선전광고물이 붙어있다. 상단에는 「대머리 이제 해결할 수 있습니다」중간에는 「무좀약 판매개시」그리고 하단에는 「과립식 비타민 C XXX」라고 씌어져 있다. P는 진열장을 열어 사내가 주문한 것을 꺼낸다. 봉투에 넣어 사내에게 건네준다. 사내가 돈을 꺼낸다. P는 사내에게 거스름돈을 준다. 사내는 밖에로 나간다.
  H여사는 거울에 비춰지는 자신의 히끗 히끗한 머리칼을 쓰다듬으려 회한에 잠겨있다. 어느새 오십줄을 바라보고 있는 이마에는 훈장처럼 주름이 몇겹으로 늘어있다. 조금 열려진 가게방 문틈으로 대낮부터 취해있던 남편의 코고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새어나온다. 「그 애가 죽지않아 살아있더라면ㆍㆍㆍ」H여사는 몇해 전에 죽은 아들을 떠올린다. 여행을 갔다오겠다던 아들이 남도의 어느 호수에서 시체로 떠올랐을때 여사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외아들이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남편은 그날 이후 술에 빠져버렸다. 왜 아들이 죽었는지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ㆍㆍㆍㆍH여사는 남편의 슬픔을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남편 몰래 外出을 하곤 하였다.
  낯선 사내가 가게문을 밀치고 들어선다. H여사는 긴장한 채로 일어선다. 무어라고 중얼거리는 사내의 왼손에는 내용물이 보이지 않는 포장물이 들려있다. 형광불빛에 반사되는 사내의 얼굴은 약간은 희열에 들뜬 표정이다. 사내는 H여사가 반응이 없자 다시 무어라고 말을 한다. H여사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H여사는 도마 위의 커다란 식칼을 집어든다. 그리고 냉장고문을 열어 고기를 꺼낸다. 고기를 써는 소리, 이윽고 사내는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H여사에게 건네주고 H여사는 고기가 든 비닐봉투를 건네준다. 사내가 인사를 한다. 사내가 나가고 가게문이 닫힌다. 그문에는 불빛에 반사되는 썰렁한 파란 글씨가 보인다.-고기는 냉장고에 있습니다.
  아내로부터 K는 전화를 받았다. 해미가 이상하다는 내용이었다. K는 낮은 음성으로 「병원에 데려가보지 그래」하고 말했으나 수화기 사이에서 울려오는 그 공허한 반향이 낯설음을 감출 수 없었다.
  『회사 앞에서 점심시간에 기다리겠어요.』
  아내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K는 당황하였다. 아내는 심각한 목소리를 그에 들려준 적이 없었다.
  『급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나와?』
  K의 음성은 한 옥타브 올라가 날카롭게 발음되었다.
  『아니예요. 조금 더 지켜보고ㆍㆍㆍ애가 먹은 것을 토하고 있어요. 점심시간까지 대어서 갈께요!』
  전화는 끊어졌다. 뚜ㆍ뚜ㆍ뚜하고 통화음 끊긴 소리가 들려왔다. K는 마치 그 소리가 자신의 목에서 올려나오는 듯해서 목을 어루만져 보았다.
  K는 L과장으로부터 호출당하였다. 3/4분기 자금지출 소요내력서를 작성하라는 것이었는데 영업활동비란과 특별활동비란은 이미 누군가에 의해 수치가 채워져 있었다. K는 말했다.
  「저, 과장님? 여기 이 명목탄에는 명세서가 첨부되어야 하는데 각종 영수증ㆍ전표와는 편차가 심한 수치이라서ㆍㆍㆍㆍㆍ」
  「K씨, 그런것은 적당히 꾸며서 첨부해놓아요. 이 일 한두번 해보시요. 물론 대차대조표의 차변과 대변은 일치해야할테지만, K씨가 이 일 오래동안 해왔으니 잘 끝내리라 믿습니다」
  L의 이마는 땀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L은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닦는다. 「그렇지만 과장님, 원칙에 위배되는 사항이라ㆍㆍㆍㆍ그리고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ㆍㆍㆍㆍ」
  L의 눈썹이 치켜져 올랐다.
  「아니, 이봐요 K씨? 그래서 지금 못하겠다는 거요. 난 K씨 그렇게 안봤는데 오늘따라 왜 이래 정말. 그 정도는 내려오는 관례 아니요 관례. 내가 그 돈을 다 삼키기라도 했다는 거요 뭐요?
  알만한 사람이 왜 이럴까. 지난번 월급인상때 K씨 기본급인상에 누가 힘썼는지 알긴 알고나 하는 소린지ㆍㆍㆍㆍ흠. 아무튼 이번 주내까지 작성해 올리시오. 나가봐요?」
  K는 머뭇거렸다. 다시 L의 툭 쏘는 시선이 날아왔다.
  「아니 정말 일 안할거요?」
  K는 자리에 돌아와 책상위의 서류뭉치를 던졌다. 옆자리의 C가 조용히 속삭였다.
  「거 너무 신경쓰지 말아. 해달라는 데로 갔다주면 끝나는 거지 뭐. 우리야 시키면 시키는데로 하면 되는거야. 나중일은 알게 뭐야. K씨에게 조만간 좋은 일 생길지도 모르지. 아 참 방금전에 시골집에서 전화왔었는데 전화좀 해달라더군. 아주 급한 목소리더라구!」
  K는 전화기를 끌어당긴다. 전화를 건다. 뚜, 뚜, 뚜, 통화중이다. K는 재발신코드를 누른다ㆍㆍㆍ오 K냐, 나 당숙이다. ㆍㆍㆍ그래 잘있다. 아버지가 위독하시다. ㆍㆍㆍ아니다. 그나이에 굳이, 싸움을 하시겠다고 나서시더니ㆍㆍㆍㆍ그래 바로 그일 때문이지ㆍㆍㆍㆍ그래, 내려올수 있겠냐ㆍㆍㆍ 알겠다ㆍㆍㆍ그래, 그래 후딱 내려오너라ㆍㆍㆍ음 끊는다ㆍㆍㆍㆍK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비를 잔뜩 품고있는 것처럼 웬지 우중충한 색깔의 구름이 하늘을 가득 덮고 있었다.
  K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차륜과 레일이 맞닿으면서 나는 소리가 K는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차창의 유리면에 낯익은 얼굴이 희미하게 보인다. 얼굴은 초췌해보이고 눈만이 덩그라니 떠있다.
  이제 기차는 터널로 진입하는 중이다. K의 얼굴이 더욱 선명하게 차창에 비춰진다.
  -좋아요 K씨, 아버지가 위독하시다니 가뵈어야죠, 하지만 제출서류는 기일을 지켜줬으면 좋겠소이다. 하라는 데로만 해줘요. K씨 손해볼 일은 없을거요!
  -아니, 아이가 이 지경이 되도록 뭣들 하셨어요! 자폐증이 나타나고 있어요. 게다가 성장이 중단될지도 몰라요. 집에는 연탄 때시나요? 반지하라구요! 방을 옮기시는게 좋겠어요? 아이가 상쾌한 공기를 마실 수 있도록 말이예요. 매일 한 번씩 진찰을 받도록 하세요. 이 증세는 매일 상태를 관찰해야 해요. 아이가 사랑스러우시죠?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세요.
  -여보 어떻게 하죠. 어떻게 해요?
  K는 혼란스럽다. 무엇인가 분명히 잘못되어가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것 같은데 K는 그것을 알 수 없었다. K는 혼란스럽기만 하다.
  K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기적소리가 들린다. 팔려가는 송아지를 부르는 어미소의 울음같은. 밤기차의 차창은 바깥 풍경보다 오히려 안의 풍경을 더 잘 반사시킨다. 기차는 이제 터널을 지난다. 차창유리에 K의 얼굴이 선명하다.
  -좋아요 K씨. 제출기일을 지켜줘요. K씨 손해볼 일은 없을거요 하하하
  -자폐증이 나타나고 있어요. 성장발육이 중단될 지도 몰라요. 이사를 하세요?
  -어떻게 해요, 여보?
  -우리 마을까지 포함해서 세개 면이 수몰된다는 구나.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군청까지 가서 연기해달라고 진정도 넣고 그 데몬가도 하고 했는데 굳이 따라나서시더니 경찰들에게 밀리다 옆구리 찧이셨다. 오래못사실 것 같다.
  -난 이제 늙었다. 살면 얼마나 더 살겠느냐. 한 평생 이 넙적골에서 땅만 파먹고 살았다. 너희 할아버지도 그 위에 할아버지도ㆍㆍㆍㆍㆍ내 눈감기 전에는 절대 이 집을 못나선다 얘야. 알아듣겠느냐? 암 절대 못하고 말고!
  -여보게 잘 내려왔네. 내 말좀 들어보게. 이게 다 국민들 잘 살자고 하는 짓이지 누가 제 고향을 물 잠긴다는데 좋아할 놈있는가. 허나 나라에서 다 안목 높으신 분덜이 하시는 일이고 또 샛마재에 새로 마을을 지어준다고 하고 보상도 해준다고 하고, 댐이 완성되면 관광자원으로 개발도 된다니께 누이좋고 매부좋고 아니겠능가. 나도 가슴이 아프네 이장이 무신 죄가 있는가. 이 사람아 자네 아버지만 도장 찍으면 되네. 이게 다 국민된 도리랑게. 도리.
  기차는 터널을 빠져 쉬지않고 달린다. K는 혼란스럽다. 기차 안을 둘러본다. 하행선보다 상행선이 더 복잡한 것 같았다. 서서가는 승객들이 많다. 사람들을 돌아보며 K는 혼란스럽다. 이 새벽에 이 많은 사람들은 무슨 볼 일이 있어 밤길을 나선 것일까. K는 답답하다. 짤려진 밤하늘에 별 몇개가 희미하게 떠 있다.
  『당신이야. 잠을 깨워서 미안해. 여기 역인데 나 곧장 회사로 출근해야겠어ㆍㆍㆍ. 응, 해미는 좀 어때ㆍㆍㆍ잠을 못잤다구, 알았어. 일 끝나는데로 곧장 들어갈께ㆍㆍㆍㆍ아버지? 들어가서 이야기 하도록 하지, 응 그래ㆍㆍㆍㆍ뭐라구, 적금을 해약하겠다구, 이봐, 이따 이야기하자니까ㆍㆍㆍㆍ그래, 피곤해 전화가 어쨌다구ㆍㆍㆍㆍ』전화가 끊어졌다. 동전이 다 된 모양이었다. K는 공중전화밖에서 나와 역광장을 바라보았다.
  또 다른 열차가 도착했는지 개찰구로부터 사람들이 쏟아져나왔다. 한결같이 피곤한 모습들. 그들은 목적지가 정해져 있는지 모두 총총걸음으로 사라진다.
  K는 배가 고파옴을 느꼈다. 어제 저녁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것이었다. K는 건너편 건물에 식당이 있음을 보았다. K가 맞은편 건물로 가기위해 얇은 비닐이 깔린 듯한 새벽역광장을 가로질러 지하도 입구에 다달았을 때 누군가 K의 소매를 잡았다.
  『아저씨. 자고 가세요. 여행하시느라 피곤하시죠?』
  돌아보니 앳되어 보이는 아가씨가 K의 소매를 잡고 흔든다.
  『나, 난ㆍㆍㆍㆍㆍ지금 회사에 출근중이오, 아가씨? 미안해요』
  『출근 전에 잠깐 연애하신느 것도 이색적이지 않나요? 놀다 가요 네?』
  아가씨는 집요하게 K를 공략한다.
  『제가 마음에 안드시면 다른 아가씨를 소개해드릴 수도 있어요. 가요, 우리, 네?』
  K는 재빨리 소매를 뿌리치고 황급히 지하도로 내려선다. 뒤에서 아가씨의 욕설이 뒤를 쫓아온다. 지하도는 K를 삼켜버린다.
  세라는 피던 담배를 구두발에 비벼껐다. 그녀가 아까부터 점찍어 놓은 사내가 다가온다. 역광장을 가로질러오는 폼이 영락없이 부족한 그녀의 수입을 채워줄 것 같다.
  사내가 다가온다. 양복을 걸치고 있지만 그다지 부유해 뵈지는 않는다. 양미간을 잔뜩 찌푸린 사내의 걸음걸이에는 어딘가 모르게 쓸쓸하고 외로운 냄새가 풍겨있다. 그녀는 사내에게 다가가 팔장을 낀다. 여행을 하시느라 얼마나 피곤하시느냐고 그녀는 말한다. 사내는 어쩔줄 몰라한다. 이제 사내가 그녀의 마지막 일당을 보장해줄 것이라고 그녀는 확신한다. 갑자기 사내가 그녀의 팔을 뿌리친다. 그녀도 사내를 따라 뛴다. 그러나 사내의 발걸음을 그녀는 따라잡을 수가 없다. 지하도가 사내를 삼켜버린다. 세라는 지하도 계단에 주저앉고 말았다.
  K는 동료들의 잡담소리에 귀를 열어놓은채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또 터졌군. 시끄러워지겠어. 수배받던 학생의 친형을 붙들어다 고문을 했다는데.
  -형이 아니라 친구라더군. 전기고문까지 해댄 모양이야. 얼마나 지독했으면 목을 매었겠어! 아무튼 큰 일이야 큰일ㆍㆍㆍㆍ.
  -각 대학은 물론이고 사회단체까지 들고 일어날거라던데ㆍㆍㆍㆍ정부에서는 유언비어를 믿지말라는 성명을 발표하였어.
  -어, 이 삼단기사 좀 보아. 오늘 아침역전 지하도에서 한 창녀가 굴러떨어져 3주 진단을 받았다는군 그래.
  이 때 사무실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L과장의 일성이 터져나왔다.
  『아니 거기들 모여서 뭣들하는 거요? 시국이고 뭐고 일들 안할거요. 그저 밥이라도 먹으려거든 모른체하고 일이나 열심히 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
  머리를 맞대고 쑥덕거리던 자들은 재빨리 자신들의 자리로 흩어져 서류뭉치를 만지작거리는 시늉에 바빴다. L은 그것보라는 듯이 미소를 짓고 돌아서다 말고 잊어버릴 뻔하였다는 듯이 K를 호명했다.
  『참 K씨, 아버진 좀 괜찮소? 내 방으로 좀 와요. 서류갖고 말이요.』
  K는 서류를 들고 L과장 앞에 섰다.
  『수고가 참 많아요. K씨, 어때요 일은 잘 되어 갑니까? 대충 했으면 어디 좀 봅시다.』
  『죄송합니다만은 아직ㆍㆍㆍㆍ.』
  K는 낮게 고개를 숙였다. 순간 L의 눈썹꼬리가 치껴지었으나 그것은 K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찰나의 변화이었다. L은 의외로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아 그래요? 너무 급히 서둘진 마시오. 기일내에만 끝내면 되니까. 이번에 감사가 있다는 것 알지요? 우리 일 끝나면 술이나 한잔 합시다. 조만간 승진 발령도 있고 할텐데ㆍㆍㆍ내가 보기엔 K씨만큼 성실한 일꾼도 드물거요 하하하.』

  낙엽이 지고 있었다. 가로수용으로 심은 은행나무와 플라타너스 잎사귀들이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쓸려다니고 있었다. 은행잎보다 플라타너스잎이 더 처참해 보였다. 그것들은 군데군데 불에 탄듯한 자국이 있거나 벌레들이 갉아먹은 구멍이 나 있었다.
  K는 양복 윗주머니를 만져보았다. 두툼한 감촉이 전해진다. K는 퇴근후 L과 술을 마셨다. L은 K에게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K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거절할 수가 없었다. K는 묵묵히 술을 마셨다. L은 그런 K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사람은 다 그렇게 사는거요.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 시조도 있지않소. 어떤 이들은 이 시조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인데 그건 세상을 살아보지 못한 자들의 아둔함에서 나오는 편견일 따름이요. 털어서 먼지 안나는 놈이 몇이나 되겠소.』
  L은 많이 취한 것 같았다. L은 K에게 2차를 가자고 하였다. K는 아내와 아이가 기다린다며 거절하였다. 그런 K를 L은 굳이 붙잡진 않았다.
  무엇이 인간답게 사는 것인가. K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고민해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문든 들었다. K가 낙엽을 밟으며 국보극장 삼거리에서 U자로 꺾어지는 왼쪽길로 접어들었을 때 한 떼의 군중들이 피켓과 플랭카드를 앞세우며 오고 있었다. K는 인도에 서서 그들의 선두가 구호를 외치며 지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K가 돌아나온 국보극장 앞으로 행진하려는 심산인 것같았다. 행렬의 중간 정도가 K의 앞에 당도했을때 K는 문득 낯익은 얼굴 하나를 발견하였다. K는 무심코 그 얼굴에 가까이 가려고 군중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노래와 구호소리는 점점 가열되고 있었고 선두의 행렬은 건물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K는 좀처럼 그 얼굴과 가까와질 수 없었다.
  갑자기 군중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다른 골목으로부터 완전무장을 한 전경의 무리들이 나타나 시위대를 향하여 최루탄을 쏘아대기 시작한 것이다. 앗, 위험해 K는 쓰러지는 얼굴을 보았다. 어느새 도로복판에는 얼굴 홀로 남겨져 있었다. K는 달렸다. K는 얼굴의 손목을 잡아 일으켜 세운 다음정신없이 뛰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뛰어야 한다는 생각만이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K가 골목 막바지게 가지 뛰었을때 K는 뒷통수에 둔탁한 충격이 옴을 느꼈다.
  -다 그렇게 그렇게 사는거요.
  -아저씨 피곤해 보이시는 군요. 쉬었다 가세요.
  -쥑일 놈들이야. 큰일이라구
  -내 죽기 전에는 어림도 없다.
  -자폐증이예요. 자폐증
  -설득 좀 해보게. 누이좋고 매부좋고ㆍㆍㆍ.
  수 많은 얼굴들이 K의 앞에 어른거렸다.
  『이제 정신이 드시는군요?』
  둥그런 얼굴이 보였다. 흰가운을 걸친 사내가 보인다. 동그란 얼굴의 여인은 K가 아는 얼굴이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만하기 다행입니다. 가벼운 찰과상정도니까요. 돌멩이가 빗맞았거든요. 퇴원하셔도 되겠습니다.』
  K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제가 여기 어떻게ㆍㆍㆍ.』
  H여자는 아무말하지 말라는듯이 고개를 조용히 끄덕거렸다. H여자가 K의 손을 잡았다. K는 그 손이 참 따뜻하다고 느꼈다.
  『지금 몇 시나 되었죠. 아내가 몹시 걱정할텐데ㆍㆍㆍ.』
  『새벽 5시에요. 혹시나 해서 주머니를 뒤져 전화번호를 찾았더니 국이 바뀌었더군요. 그럴리가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ㆍㆍㆍ.』
  그제서야 K는 오늘아침 아내의 마지막 말의 의미가 떠올랐다.
  『혹시 주머니에서 다른 것은ㆍㆍㆍ』
  『다른거요. 못보았는데, 왜요. 잊어버린 물건이라도 있어요?』
  『아닙니다. 잊어버린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K는 전화기를 당겨 버튼을 누른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지금 거신 전화번호는 국번만 변경되었사오니 확인후 다시 걸어 주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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