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윤선애 교수 한국인 최초 '왼손만을 위한 피아노 독주회' 열어

 

  축구선수가 한 쪽 발로만 그라운드를 뛰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까. 한 손으로 피아노를 연주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렇다. 한 손을 쉬게 내버려두는 것도 다른 한 손더러 더 열심히 움직이라고 하는 것도 두 손을 가진 피아니스트에겐 힘든 일이다.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인 오른손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많지 않다. 두 손으로 연주할 때의 풍성함을 놓치지 말라고 이따금씩 왼손을 쓰다듬거나, 힘들어하는 왼손을 위해 몸을 지탱하는 게 전부다. 왼손은 여느 연주 때보다 바삐 움직인다. 피아노 건반이 유독 길어 보이는 17일 밤이었다.

  한 시간에 걸쳐 다섯 곡의 연주가 끝나자 끊임없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녀는 앙코르 연주에서 오른손을 건반 위에 올렸다. 연주회 시작 이후 처음 오른손이 그녀의 무릎 위를 떠났을 때다. 물론, 세 번째와 네 번째 손가락은 자유스럽지 못했다. “호기심 때문에 오신 분들도 많았을 거라 생각해요. 한 손가락으로 건반을 누르는 게 가능한가, 열 손가락으로 연주하는 것과 뭐가 다를까, 소리는 어떻게 날까 같은 궁금증을 가지고 제 연주회를 찾으셨을 거예요. 독주가 끝나고 여기저기서 축하를 많이 받았어요. 감동을 받았다면서 눈물을 흘린 분도 계시고요.”

  연주회가 끝난 지 일주일 째 되는 날 음악과 윤선애 교수의 연구실을 찾았다. 좁은 공간에 피아노 두 대가 마주보고 있었다. 연주회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2년 전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자리를 지킨 곳이다. “멜로디와 반주. 한 손이 이 두 가지를 해야 하기 때문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공을 들여 연주를 해야 돼요. 그래서인지 그만큼 빨리 지치더라고요.” 오로지 한 손만을 사용해야 했던 윤 교수의 연습 시간은 하루 두 시간을 넘지 못했다. 그렇기에 더 긴 연습 기간이 필요했다.

  불행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유학 생활을 마치고 1985년 귀국연주회를 시작으로 활발한 국내 활동을 한지 10년째 되던 해였다. 오른손의 움직임이 둔해진 것이다. “피아노를 치는데 갑자기 뻑뻑한 느낌이 난다고 해야 하나. 오른손의 세 번째, 네 번째 손가락이 이상한 게 느껴지더라고요.” 병명도 모르고 치료법도 없었다. 손가락이 가장 중요한 재산인 피아니스트에게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처음에는 주변 사람들한테 알리지 않았어요. 좋은 일도 아니잖아요. 그렇다고 손 전체가 마비될 만큼 나쁜 상황은 아니었고요.” 선뜻 수술을 결정할 수도 없었다. 오히려 더 안 좋아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한 줄기 희망의 빛을 찾았다. 2001년 ‘레온 플라이셔’의 내한 공연을 보게 된 것이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였던 그의 ‘한 손 연주’에서 큰 자극을 받았다. “저런 것도 있구나, 나도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을 하게 된 거죠.” 그렇게 10여 년이 지났다. 그 시간 동안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것은 왼손의 감각과 긍정적인 마음이다. 윤 교수는 “오른손은 건반 위에서만큼은 제 역할을 못하게 됐지만 왼손은 멀쩡하니 그나마 다행”이라며 “불편한 오른손으로 억지로 연주를 하려니까 고통이 심했는데, 왼손은 연습하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서 차라리 속이 편하다.”고 말했다.

  그녀는 지금 또 다른 연주회를 준비하고 있다. 전문연주자로 활동하는 제자들과 함께 만든 연주모임인 ‘소리愛’의 공연이 5월에 열리기 때문이다. 또한 윤 교수는 비엔나 국립음대에서 실내악 코스에 참가했던 경력을 바탕으로 ‘왼손으로 연주하는 실내악’을 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피아니스트이기 전에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잖아요. 적지 않은 나이에 독주회를 계속 하는 것도 음악에 대한 연구와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 새로운 연주들도 들려주고 싶기 때문이에요. 그게 제 의무라고 생각해요.”

장애리 기자  sam2408@naver.com
사진제공/윤선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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