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문에서 궁동119안전센터로 가는 길, 차량이 일렬로 주차돼 있다. 사진/ 김민수 기자
쪽문에서 궁동119안전센터로 가는 길, 차량이 일렬로 주차돼 있다. 사진/ 김민수 기자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권리, 그중 보행자를 위한 권리가 있다. 다소 낯선 ‘보행권’이 그 주인공이다. 보행자를 위한 권리가 무엇인가 싶겠지만, 답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안전하고 편리하게 걸을 권리다. 이때 보행자는 두 발로 걷는 사람부터 휠체어를 타는 사람까지를 모두 포함한다. 고로 세상 모든 사람은 보행자이며, 보행권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권리이자 보장받아 마땅한 권리다.

  그렇다면 우리가 걷는 길은 안전하고 편리할까? 과연 우리가 살고 있는 대전시는 ‘걷기 좋은 도시’일까?

궁동 로데오 거리 인근, 옥외광고물과 쓰레기들이 너저분하다. 사진/ 김민수 기자
궁동 로데오 거리 인근, 옥외광고물과 쓰레기들이 너저분하다. 사진/ 김민수 기자

  우리 동네 보행권 보고서

  기자는 먼저 보행자가 실제로 체감하는 보행환경을 알아보고자 대학가인 궁동을 비롯해 우리 학교 인근을 직접 걸어봤다.

‘매드블럭’ 건물 앞 사거리, 보행자들이 사거리를 건너고 있다. 사진/ 김민수 기자
‘매드블럭’ 건물 앞 사거리, 보행자들이 사거리를 건너고 있다. 사진/ 김민수 기자

  - 좁아진 보행 공간

  기자가 먼저 찾은 곳은 우리 학교 쪽문. 쪽문을 지나 궁동119안전센터 방향으로 가는 길에는 주차된 차량이 일렬로 늘어서 있다. 이곳은 차량 두 대가 겨우겨우 지날 만큼 협소한데, 그마저도 주차된 차량 탓에 길이 절반으로 줄었다. 주차된 차량 위쪽에는 주정차 금지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내걸려 있다. 원래대로라면 주차된 차량이 없어야 하는 곳이다. 유달리 이곳만 그런 것은 아니다. 궁동 어디를 가나 골목 한 켠을 불법 주정차 차량이 차지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길이 좁으니 지나가는 와중에 차를 마주친다면 곤란하기 그지없다. 기자는 다가오는 차를 피하고자 주차된 차량 틈새에 몸을 밀어 넣었다. 작은 틈새마저 허락되지 않을 땐, 주차된 차량 방향으로 몸을 한껏 붙여야 했다. 어제 세탁한 옷에는 먼지와 검댕이가 묻어났다. 궁동119안전센터 인근을 자주 왕래하는 최광현(건축학·3) 학우는 “여러 차량이 연달아 지나가면 보행이 어려워 정말 답답하다”며 불편을 토로했다.

  2022년 기준 우리나라의 자동차 등록 대수는 2,500만 대를 돌파했다. 국민 2명 중 1명은 자동차를 보유한 셈이다. 대전시의 통계에 따르면 2022년 한 해 동안 불법 주정차 단속에 적발된 건수는 5개 구를 모두 합쳐 자그마치 41만 8,762건으로 집계됐다. 이에 유성구청도 주기적으로 단속에 나서고 있지만, 불법 주정차 문제 해결에 골머리를 앓는 모양새다. 유성구청 주차관리과 담당자는 “궁동이라는 동네가 계획되고 조성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주차 공간이 부족하고, 원래 있던 공영 주차장이 사라져 주차 공간이 더 부족해진 것 같다”며 답답함을 내비쳤다.

  골목에서 나와 기자는 조금 더 큰 길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보도 곳곳에 놓인 입간판과 쓰레기들이 발목을 잡는다. 보도를 걷는 내내 입간판과 쌓여있는 쓰레기를 피해 가는 데 집중했다. 좌로 갔다 우로 갔다, 발걸음이 분주해진다. 몇몇 보행자들은 늘 있는 일인 듯 차도 한가운데를 걸었다. 그러다 뒤에서 자동차와 배달 오토바이가 접근하자 화들짝 놀라며 길을 비킨다. 걷기 위한 공간은 마련돼 있음에도, 그 위를 걷기 어려운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그렇다면 궁동에 설치된 입간판의 개수는 얼마나 될까. 기자는 궁동로18번길에 설치된 입간판의 개수를 세어 봤다. 궁동로18번길은 쪽문 이마트24 편의점부터 로데오거리 방면으로 쭉 이어지는 길로, 우리 학교 학우들이 자주 오가는 길이다. 하나, 둘, 셋, 넷···. 입간판의 개수가 점점 늘어난다. 몇 개쯤 셌는지 기억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렇게 기자가 거리의 끝에 다다랐을 때 입간판의 개수는 총 67개, 로데오 거리에 놓인 것들까지 합치면 106개에 달했다. 궁동로18번길의 길이가 약 500m이니, 단순 계산으로 보행자는 다섯 발짝 걸을 때마다 입간판 하나를 마주치는 셈이다.

  이렇듯 입간판은 보행자의 통행을 방해하는 것은 물론이고, 보통 입간판은 광고를 위해 보행자와 마주보도록 놓이기에 보행자의 시야를 가려 사고를 유발할 수 있다. 우리 학교 김자헌(정치외교학·3) 학우는 “좁은 인도 사이사이에 입간판이 설치돼 있어 편하게 걸어 다니기 어렵고, 입간판과 사람을 피하다 보면 도로로 걸을 때도 많다”고 전했다. 이어 “도로에는 차뿐만 아니라 오토바이, 전동 킥보드, 자전거 등이 수시로 다니기 때문에 결국 보행자는 위험한 환경에 내몰리는 셈”이라며 불만을 표했다.

  문제 해결도 요원한 상태다. 유성구청 건설과 담당자는 “옥외광고물법에 따라 단속을 진행하고 있지만, 위반 사항을 지속해서 단속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어 신고나 민원이 접수되면 현장에 나가서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김자헌 학우는 “영업이 끝나면 건물 안으로 입간판을 넣어두는 가게도 많은데, 궁동의 상인분들이 적어도 이 정도의 조치만 취해준다면 좋을 것 같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온천1동 행정복지센터 사거리, 횡단보도를 위태롭게 건너는 노인 보행자 사진/ 김민수 기자
온천1동 행정복지센터 사거리, 횡단보도를 위태롭게 건너는 노인 보행자 사진/ 김민수 기자

  - 늘어난 위험 요소

  이른 아침 등굣길, 전동 킥보드 위의 QR 코드를 찍는 학우들의 손놀림이 분주하다.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니, 현재 시각은 정각 5분 전. 아무래도 모두 지각을 면하려는 눈치다. 킥보드가 작동하며 울리는 ‘삡’ 하는 소리가 연신 들려온다. 이윽고 킥보드는 ‘우우웅’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먼발치 너머로 사라졌다. 이미 교정 이곳저곳에서 킥보드와 전기 자전거가 정신없이 오간다. 어느 때부터 우리에게 그리 어색하지 않게 된 풍경이다.

  이렇듯 PM(개인형 이동장치)은 도심 속 새로운 교통수단으로서 주목받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안전 문제로 우려를 표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우려는 어느 정도 현실이 된 모양새다. 이를 증명하는 통계도 있다. 한국교통안전공단 자료에 의하면 2022년 PM과 자전거 사고로 숨진 사람은 전년도 대비 각각 36.8%, 30%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두 바퀴’ 교통수단이 보행자 안전의 사각지대로 떠오른 것이다.

  기자가 길을 걷는 도중에도 PM이 보행자 안전을 위협하는 장면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전동 킥보드를 타고 보도로 통행하는 게 대표적인 사례다. 원칙적으로 PM은 자전거 도로 또는 차도 가장자리에서 운행하게 돼 있다. 그러나 차도에서 운행하는 경우는 가뭄에 콩 나듯 했고, 보행자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일도 적지 않았다. 김지수(정보통계학·1) 학우는 “등하굣길에서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는데도 불구하고 PM이 빠른 속도로 다니기도 하고, 그럴 때마다 인도에 조그만 자동차가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며 불편을 호소했다.

  그뿐만 아니라 PM 이용자의 운행 행태도 위험천만해 보였다. 헬멧 같은 보호장구를 착용한 사람은 볼 수 없었을뿐더러 이따금 PM 한 대에 두 명이 함께 타거나, 귀에 이어폰을 꽂고 운행하는 사람도 보였다. 이러한 운행 행태는 엄연히 불법임은 물론이고, 자칫 큰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다.

  배달 오토바이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배달 기사는 건당으로 수익을 가져간다. 짧은 시간 내에 최대한 많은 주문을 처리하는 게 유리한 수익 구조다. 그렇다 보니 일부 배달 기사는 빠르게 주문을 처리하기 위해 과속하거나 인도와 횡단보도를 넘나드는 등 안전 운전에 소홀한 모습을 보였다. 그 모습은 마치 운전이 아닌 ‘곡예’에 더 가까운 듯했다. 이러한 행태는 통계로도 드러난다. 2023년 도로교통공단 책임연구원의 ‘배달 이륜자동차 운전자의 위험 행동 특성 분석 연구’에 따르면 배달 오토바이 운전자의 약 39.8%가 과속, 신호위반, 중앙선 침범 등의 행태를 보였다고 한다.

  PM과 배달 오토바이는 차량이 들어오지 못하는 골목 사이사이를 드나들 수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교통수단으로서는 굉장한 장점이지만 도리어 보행자의 안전에는 위험 요소로 작용한다. 어느새 골목 너머의 위험 요소가 골목 속으로 침투해 버린 것이다.

  - 목숨 걸고 길 건너기

  기자는 우리 학교 정문과 온천교를 지나 봉명동 ‘매드블럭’ 건물 앞의 사거리를 찾았다. 이 사거리는 정문부터 쭉 뻗은 대로를 기점으로 유성2교와 온천교가 마주하는 지점이다. 사거리를 이리저리 살폈다. 유독 기자의 눈에 띈 것은 사거리의 너비였다. 차로를 세어보니 유성온천역 방면은 4차로, 충대정문오거리 방면은 5차로였다. 워낙 사거리가 넓어 맞은편에 아는 사람이 지나가도 유심히 보지 않으면 잘 모를 정도다.

  사거리가 넓으니 보행신호시간이 짧진 않을까, 직접 횡단보도를 건너보기로 했다. 도로 위를 분주히 오가던 차들이 서서히 멈추고, 초록불이 들어왔다. 길을 건너는 데 주어진 시간은 38초. 초록불이 들어오자마자 발을 떼 평소 걷는 속도대로 횡단보도를 건넜다. 길을 다 건넌 후 뒤를 돌아보니 남은 시간은 12초였다. 일반적인 성인 남성의 보행 속도라면 건너는 데 크게 무리가 없는 보행신호시간이었다.

  그러나 노인이나 교통약자처럼 걷는 속도가 느리다면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마침 도로를 관찰하는 기자 앞에 한 어르신이 힘겹게 길을 건너고 있었다. 초록불이 연신 번쩍거리는 상황에서 어르신은 걸음을 재촉하며 바쁘게 나아갔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모두 횡단보도를 건넜음에도 어르신은 아직 횡단보도에 남아있었다. 다행히 어르신은 빨간불이 켜지기 전에 보도를 벗어났고, 차량 신호가 들어오자 차들은 기다렸다는 듯 속도를 냈다. 하마터면 위험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렇듯 누군가는 횡단보도를 건널 때마다 시간에 쫓겨야 하는 상황에 놓이곤 한다.

  통상 보행신호시간은 ‘보행 진입 시간’으로 7초가 주어지고, 여기에 ‘횡단보도 보행 시간’으로 횡단보도 1m당 1초를 더해 산정한다. 가령 횡단보도가 10m라면, 길을 건너는 데 17초가 주어지는 셈이다. 단, 노인보호구역에서 횡단보도 보행 시간은 횡단보도 0.8m당 1초로 완화된 기준을 적용한다. 일반 성인과 고령층의 보행 속도를 각각 1초에 1m, 0.8m를 가는 것으로 가정하고, 이를 염두에 둔 조치다. 또한 노인보호구역이 아니더라도 보행신호시간은 필요에 따라 줄이거나 늘릴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고령층의 보행 속도가 생각처럼 빠르지 않을 수도 있다. 지난 2018년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와 카이스트 연구팀이 공동으로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국내 노인 중 하위 25%의 보행 속도는 남성이 1초에 0.663m, 여성이 0.545m를 가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의 보행 속도로 길이 34m에 달하는 매드블럭 앞 사거리의 횡단보도를 건너려면 각각 51초, 62초가 걸린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데 주어진 38초가 이들에게는 턱없이 부족할 따름이다.

  사거리를 지나 더 먼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기자가 도착한 곳은 온천1동 행정복지센터 앞 사거리. 이곳은 횡단보도는 있으나 신호가 없는 곳이다. 그만큼 사고도 잦다. 도로교통공단의 교통사고분석시스템에 의하면 이 사거리는 2020년 ‘보행노인사고 다발지역’으로 지정된 바 있으며, 이곳에서만 지난 3년(2020~22년)간 6건의 보행자 교통사고가 발생했다.

  보도에 서서 한동안 도로의 상황을 지켜봤다. 신호등이 없어 골목을 드나드는 차량과 대로에서 직진하는 차량이 한데 뒤엉키는 일이 잦았다. 차량 간의 신경전이 오간다. 차량과 보행자와의 ‘눈치 게임’도 벌어진다. 보행자는 그저 움찔움찔하며 건널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기다림을 참다못해 차량이 오가는 와중에도 그사이를 묘기 부리듯 빠져나가는 사람이 보였다. 간혹 보행자가 건너는 와중에 자동차가 머리를 바짝 들이미는 경우도 있었다. 면전에서 차를 맞닥뜨린 보행자의 표정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 근방을 자주 지나다닌다는  한 시민 A 씨는 보행신호가 없어 불편하지 않으냐는 질문에 “불편하다”고 답하며 “(차량과 보행자 모두) 서로 조심하면 좋겠지만, 그게 좀처럼 잘 안되니 신호가 있으면 참 고마울 것 같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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