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행권, 언제 시작됐나

  우리나라는 자동차 역사가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비교적 짧다. 지금이야 자동차가 흔하지만, 과거 자동차는 ‘동네에 한 대 있을까 말까’ 한 물건이었다. 그런 우리나라에서 자동차가 급격히 늘어난 것은 1980년대 말이다. 1985년 100만 대에 불과했던 자동차 등록 대수는 7년이 지난 1992년에 5배인 500만 대로 증가했다. 1년에 대략 60만 대씩 불어난 셈이다.

  자동차가 급격히 늘어나자 교통계획이나 도로 위 문화 역시 자동차 중심으로 조성됐다. 반면 보행자의 교통안전에 대한 관심과 투자는 상대적으로 적은 수준에 그쳤다. 길의 주인은 보행자가 아닌 차량이었다. 그 결과 전체 교통사고 사망자 중 보행자가 절반을 차지했고, 안전하지 못한 보행환경이 화두로 떠올랐다.

  이에 녹색교통운동을 비롯한 여러 시민단체가 보행자의 권리를 주장하고 나서며 보행자의 권리를 증진하기 위한 노력이 하나둘 전개됐다. 횡단보도가 더 많이 설치되고, 보도가 정비되는 등 보행환경이 차츰 개선됐다. ‘차 없는 거리’처럼 보행자가 중심이 되는 도로도 생겨났다. 1995년에는 ‘어린이 보호구역(스쿨존)’이 도입됐고, 1997년에는 서울시가 전 세계 인구 천만 이상 도시 중 최초로 ‘보행권 조례’를 제정하기도 했다.

  보행권, 이제는 법이다

  지속적인 노력을 거쳐 보행권은 법률로도 제정됐다. 지난 2012년 제정된 ‘보행안전 및 편의증진에 관한 법률’은 보행권의 의미를 더욱 확고히 했다. 해당 법률에 따르면 보행권이란 ‘국민이 쾌적한 보행환경에서 안전하고 편리하게 보행할 권리’를 의미한다.

  다만 바퀴로 움직이는데도 보행자로 간주하는 것들이 있다. ‘도로교통법’에 의하면 ▲유모차 ▲보행보조용 의자차(휠체어 및 의료용 스쿠터) ▲노약자용 보행기 ▲동력이 없는 손수레 등도 보행자에 속한다. 기존에는 유모차와 보행보조용 의자차만 보행자로 포함됐으나, 작년 7월 4일 관련 시행규칙이 개정되며 보행자의 범위가 더 넓어졌다. 다시 말해 보행권이 두 발로 걸을 수 있는 사람만을 위한 권리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여전히 위협받는 보행권

  과거에 비해 나아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보행권은 위협받고 있다. 도로교통공단의 통계에 따르면 2022년 전국의 보행자 교통사고 건수는 전년 대비 약 10% 증가했다. 같은 해 대전시의 보행자 교통사고 건수도 전년 대비 10% 늘어나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실질적으로 보행자 교통사고가 여전히 자주 발생하고, 최근 들어서는 오히려 더 많이 발생한 것이다. 보행자 교통사고 사망자가 전체 교통사고 사망자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34%로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교통사고 사망자 세 명 중 한 명이 길을 걷다 목숨을 잃은 셈이다.

  해외로 범위를 넓혀도 우리나라의 보행자 사고 수치는 높은 편에 속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020년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전체 교통사고 사망자 가운데 보행 중 사망자 비율은 OECD 회원국 평균의 2배, 회원국 중 가장 높은 수치를 보였다. 인구 10만 명당 보행 중 사망자 비율을 살펴봐도 우리나라는 칠레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우리나라가 ‘교통안전 선진국’이 될 때까지 아직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최광현 학우는 “(보행하며 마주하는) 위험이 이미 당연한 일상이 돼 위험한지도 모르고 사는 것 같다”고 말했다. 어쩌면 우리는 걸으며 마주하는 위험들을 무심코 지나치거나, 위험에 무뎌져 불편을 참아내고만 있는 것은 아닐까. 시민단체의 목소리가 보행권 증진으로 이어진 것처럼 보행자를 위협하는 요소들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개선의 목소리를 내어보는 것도 좋은 방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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