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고 흐르는 인생에서

⑤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촬영지 경북 청송 주산지를 가다


   오랫동안 치아교정을 하고 있다. 처음 시작한 때가 몇 살이었는지 가물가물할 정도로 오래됐다. 얼마 전 치과에 들렀을 때는 모처럼 사람이 없었다. 조용함 가운데 진료를 받고 있다 보니 갑자기 그 동안의 세월이 실감났다. 진료실 의자는 길이가 꼭 맞았다. 무섭기만 했던 치과 선생님은 부쩍 기침이 잦아지셨다. 선생님의 손에선 약 냄새가 진하게 났다. 간호사 언니는 어느새 어머니가 됐고, 혼잣말이 늘었다. 정말 많은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필자는 눈에 띄게 자랐고, 의사 선생님은 세월이라는 가랑비에 젖으셨다. 진료를 받는 내내 인생에 대해 생각했다. 딱히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다. 그냥 그 오묘함에 잠시 젖었을 뿐이다.

물결이 잔잔한 주산지에 비친 주왕산의 모습

   인생이라는 주제로 펼치는 생각은 대부분 생각에서 그칠 뿐이다. 하지만 이를 심도 있게 파고든 영화가 있다.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 바로 그것이다. 이 영화는 인생을, 돌고 도는 사계절에 빗대 그 심오함을 말하고 있다. 등장하는 인물도 몇 명 없고 대사도 별로 없다. 그렇지만 그 안에 한 인물이 자라고 늙는 과정을 모두 담았다. 영화에서는 직접 붓으로 쓴 듯한 글씨로 계절이 바뀌고 시간이 지남을 알린다. 영화 속 시간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청년에서 장년으로 다시 동자승으로 시작점에 와있다. 뜨겁고 차가운 길을 걷고 난 인생이 또 한번 시작하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을 바라보는 동안 스크린 속 시야는 호수 위에 떠 있는 외로운 암자에서 떠나지 않는다. 나룻배를 타야만 들어갈 수 있는 암자는 세상의 온갖 신비로움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산과 호수에 둘러싸여 있어 더할 나위 없는 자연 그 자체인 것 같지만, 그 안에는 인생이 들어있다. 영화에서 탄성을 자아냈던 호수는 청송 주왕산 산맥에 있는 주산지이다. 이미 유명했지만 영화에 나온 뒤로 더 유명세를 탔다고 한다. 암자는 아쉽게도 영화 촬영이 끝난 뒤 몇 달 후에 철거됐다.
   갈 길이 멀다는 얘기를 듣고 이른 아침에 채비를 마쳤다. 고속도로에 들어섰을 때 마침 해가 뜨고 있었다. 하늘은 높았고 솟아오르는 해 때문에 눈이 부셨다. 일교차가 큰 탓인지 산골짝에 웅크리고 있던 산안개가 뒤늦게 몽실몽실 피어오르고 있었다. 고속도로에 들어선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산안개가 세상을 감쌌다. 바로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방이 모호해져 허공을 달리는 기분이었다. 운전대를 잡은 아버지는 안개 때문에 운전하기 힘들다고 하셨다. 그래도 안개 사이로 뻗은 햇살을 보는 것이 싫지 않으신 모양이었다. 차 안의 라디오에서는 아나운서가 진지한 목소리로 시국을 논했고, 우리는 환상 속으로 들어갔다.

주산지의 명물인 왕버들나무. 물 속에 뿌리를 내리고
기둥의 중간까지 물에 잠겨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영화 촬영지였던 주산지는 변하지 않았다. 영화에서 보여준 신비로움과 위엄은 여전하다. 쌀쌀해진 날씨에 산은 단풍으로, 또 등산객들의 옷으로 울긋불긋했다. 주산지의 명물이라는 물에 잠긴 왕 버들나무 역시 영화 속 그대로이다. 날씨가 맑아서인지 물에 비친 산봉우리는 기개가 넘쳤다. 둥글게 나무들로 둘러싸인 호수는 인자하게 산 그림자를 떠받치고 있었다. 고통과 번뇌에 대해 아무리 격렬하게 발버둥 쳐도 주산지의 잔잔한 물결 속으로 침식될 것만 같다. 청년이 된 주인공이 암자에 쓰여진 반야심경을 미친 듯이 칼로 깎아낸 후 결국 평온한 표정으로 잠드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는 노골적으로 사계절에 비유하고 있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은 노승에게 혼쭐이 나는 동자승에 비유했고, 녹음이 우거지는 여름은 욕망에 휩싸인 청소년에 비유했다. 또 싱그러움이 정점을 찍고 여위기 시작하는 가을은 아내를 죽인 뒤 모든 것을 잃고 쫓기는 청년에 비유했고, 모든 것이 자취를 감추는 겨울은 비로소 깨달음을 얻으려는 장년의 몸짓에 비유했다. 봄은 어김없이 돌아오고 동자승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업을 짓는다. 영화에 대한 해석은 이미 즐비하다. 분명한 것은 이 영화를 통해 돌고 도는 인생을 되짚어 본다는 것이다.
   흔히 인생을 흐른다고 표현하지만, 그 흐름의 구심점을 깊이 있게 논의한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영화에서 물처럼 흐르는 인생을 표현하는 배경은 고여 있는 호수였다. 주산지를 찾는 사람들은 어린 아이부터 풋풋한 젊은 연인, 나이 지긋한 어른신들까지 다양했다. 못 박힌 듯 자리를 지키는 자연과 끊임없이 변주하는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들은 여전히 한데 모여 부대끼고 있었다. 10년이 지났어도 영화가 주는 울림은 여전한 모양이다.
 

글/사진 안수진 기자
luckysujin@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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