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전한 세계의 상처

③영화 <파수꾼>의 실제 배경 원릉역을 가다

   하나의 삶은 하나의 세계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어떤 이의 생이 끝나가는 것은 하나의 세계가 사라지는 셈이다. 매일매일 셀 수 없이 많은 세계가 탄생하고 그만큼의 세계가 깨어지고 있다. 수없이 많은 세계들이 성장하고 있는가 하면, 스스로 집어던지고 깨부수어 소멸하는 세계도 있다. 영화 <파수꾼>은 아직 여물지 않은 세계에 대한 이야기다. 불완전한 세계들은 비틀거리고 서로 부딪히며 위태롭게 앞으로 나아간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작은 충돌에 지나치게 아파하며 말이다.
   북적북적한 서울을 지나 조금 올라가면 생각보다 한적한 도시가 나온다. 번화한 서울을 거쳐 온 지라 경기도 고양은 더욱 조용하게 느껴졌다. 영화를 찍은 곳은 이 도시에서 가장 한적한 곳이다. 더 이상 기차가 찾지 않는 원릉역은 경적소리가 그리운 사람들이 이따금씩 들르는 공간이 됐다. 기찻길 뒤로는 학교와 아파트가 멀뚱하니 서 있다. 기찻길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보고 있었다는 듯한 자세다
   영화 <파수꾼>은 이렇다 할 배경음악이 없다. 그렇다고 음악의 빈자리를 채울 만큼 대사가 많은 것도 아니다. 그나마 있는 대사에는 욕이 절반이다. 모든 대사들이 오늘 아침 지하철에서 들은 남고생들의 대화처럼 투박하다. 두 시간의 러닝 타임을 채우는 것은 숨 막히는 침묵이다. 침묵의 틈새에는 한숨처럼 힘겨운 숨소리가 섞여 있다. 때로는 또래 학생들의 치열한 눈치싸움이 침묵을 대신하기도 한다.

 원릉역 역사

   영화에서 잿빛으로 표현된 기차역은 아직 여름 티를 벗지 못했다. 철길 옆의 구석진 땅에는 알뜰하게 채소들이 자라고 있다. 이제 기차를 마중할 사람 대신 상추와 방울 토마토 같은 푸른 이파리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계절의 싱그러움이 더해진 것 이외에 기차역은 영화 속과 똑같다. 기태(이제훈)와 희준(박정민)과 동윤(서준영)이 야구를 하던 철길과, 그들이 걸터앉아 얘기를 하던 곳이 그대로다. 철길을 따라 쭉 걷다보면 주인공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지나가던 곳,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 하던 곳, 기태가 희준을 짓밟는 곳들을 볼 수 있다. 마지막에 혼자 남은 동윤이 “니가 최고다. 친구야”하며 기태를 그리워하는 곳 까지 영화의 흔적들이 기차역을 따라 아는 체 하고 있다. 걸음을 마치고 역사를 뒤돌아보면 철길 위에서 영화 한 편을 다시 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사실 영화가 전개되는 내내 기태에 집중하느라 다른 인물들에 공감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평소 이제훈을 눈여겨보고 있는 탓에 어쩔 수 없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기태의 관점에서 봤을 때, 이 영화는 슬프고 안타깝다. 아직 여물지 못한 정체성의 기태는 진정한 대화를 할 줄 모르는 학생이다. 말보다 몸이 앞서는 바람에 풀리지 않는 오해는 계속해서 쌓여만 간다. 진정한 우정이라는 굳은 믿음이 깨지며 잘못된 선로로 들어서는 순간 이리저리 치이며 상처를 받는다. 집에는 아들에게 무관심한 아버지뿐이다. 주목받는 것이 좋아 야구선수가 되고 싶었던 기태는 자신을 붙잡을 새 없이 파멸의 길로 들어선다. 이런 기태를 이해하지 못한 친구들은 “널 진정한 친구로 생각한 적은 없었어”라고 잔인하게 군다. 그들은 “내가 어떻게 해야 해”라며 괴로워하는 기태에게 “처음부터 너만 없었으면 돼”라고 씹어 뱉듯 말한다. 

 원릉역의 기찻길

   영화가 전개되면서 기태와 희준과 동윤이 함께 야구를 하고 놀던 기찻길에 퍼지던 웃음소리는 점점 줄어든다. 기태와 희준의 사이가 어긋난 후 희준은 기찻길에서 자취를 감추고, 나중엔 동윤마저 기태를 떠난다. 왁자지껄했던 기찻길의 무게를 기태 혼자 짊어지게 된다. 다시 찾은 기찻길은 영화에서와 달리 햇빛이 쨍했지만 무너지는 기태의 얼굴을 떠올리면 다시금 어두워진다. 그리고 무너지는 기태가 서 있던 곳에 어느새 다다랐음을 깨닫는다.
   기찻길을 둘러보던 중 특이한 것을 발견했다. 기차가 다니는 철길 옆으로 짧은 철길이 한 가닥 나 있었다. 그 샛길은 얼마 못가 가림막으로 막혀있다. 기차가 혹시라도 탈선하면 가림막에 박아버리라는 뜻이란다. 한 번 노선을 놓친 기차를 멈추는 방법은 부딪히고 부서지는 것 밖에 없는 것이다. 홀로 폭주하는 청소년들은 이와 닮았다. 위태위태하던 기태가 결국 극단적인 방법을 택한 것처럼 말이다. 기차에는 운전하는 기관사가 있지만 제어하는 이 없는 불완전한 세계들은 쉽게 다칠 수밖에 없다. 고장이 난 기차처럼 폭주하다가 결국 망가질 뿐이다. 
   지켜주는 사람 하나 없이 이리저리 채이던 청소년들은 어디로 갔을까? 영화에서 기태에게 모진 말을 뱉었던 동윤은 결국 눈물을 흘렸지만 그들의 다음 이야기는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이리저리 흔들리던 세계들이 유연하고 단단해지길 바란다. <파수꾼>의 기찻길에서 폭력을 일삼던 고등학생 이제훈이 <건축학개론>에서는 대학에 입학해 기찻길을 걸으며 손목 때리기 게임을 하던 것처럼 말이다.


글/사진 안수진 기자
luckysujin@cu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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