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심체요절에 138년 앞선 금속활자

 
  미국의 유명 시사 잡지 <Life>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준 100대 사건을 조사한 결과, 금속활자의 발명이 1위를 차지했다. 이렇듯 금속활자의 발명은 인류사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평가 받는다. 서양인들이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를 유독 사랑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미 우리나라에는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보다 78년이나 오래된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이 있다. 비록 박병선 박사를 필두로 한 반환 운동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직지심체요절>은 여전히 우리의 자긍심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그보다 138년이나 더 앞선 금속활자가 우리나라에서 새롭게 발견됐다. 진정한 세계최초의 금속활자 증도가자가 그 주인공이다.
  증도가자는 고려시대 13세기에 만들어진 금속활자로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이하 증도가)>라는 책에 사용됐다. 경북대학교 문헌정보학과 남권희 교수는 “2004년 서울 인사동에 갔을 때 고미술 화랑인 다보성이 소장한 금속활자 100여점을 보다 활자의 형태, 글자의 서체, 주조방법 등이 고려시대 증도가에 찍혔던 글씨 모양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며 “그 뒤 5년간 연구한 결과 100여점의 활자 중 12점이 1377년 활자로 직지심체요절보다 앞선 금속활자라는 사실을 발견해 2010년 학계에 발표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처음엔 국내 학계의 증도가자에 대한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다. 증도가자에 대한 여러 교수들의 문제 제기는 물론 M본부의 모 방송에서도 증도가자에 대한 의혹을 보도하며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증도가자에 잔류된 먹의 탄소연대 분석이 이런 논란들을 가라앉혔다. 증도가자의 시료에 부착된 먹을 분석하면 먹이 사용됐던 연도를 대략적으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지질자원연구소에서 활자의 주조와 사용 시기를 증명하기 위해 활자의 표면에 잔류하고 있는 먹을 탄소연대측정법으로 분석했다. 그 결과 11~12세기의 먹이라는 결과를 얻었다. K본부의 모 방송에서도 지질자원연구소와 일본 쪽에 의뢰한 결과 증도가자가 고려시대의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이렇게 증도가자는 약 2년간의 과학적인 분석으로 여러 논란을 잠재우고 새로운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렇다면 증도가자는 대체 무엇이기에 이토록 국내외 학계의 관심을 받는 것인가? 이는 <직지심체요절>과는 다른 증도가자만의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직지심체요절>은 고려시대 당시 지방의 작은 사찰에서 찍어낸 금속활자본이지만 금속활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직지심체요절>과 달리 증도가자는 현존하는 유일한 금속활자 실물로 고려정부가 개성에서 직접 주도해 만든 것이다. 실제로 현재 우리나라에는 구텐베르크 활자보다 빠른 조선 초기의 계미자, 경자자, 갑인자 등 금속활자의 기록은 있지만 실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금속활자가 현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 오래되기까지 한 증도가자는 매우 중요한 발견이다.
  증도가자는 이제 논란에서 벗어나 국내 학계에서 인정받으며 새로운 비상을 준비 중이다. 남권희 교수는 “2004년 발견과 연구를 거쳐 2010년 발표한 후 중국, 일본, 독일의 관련 학자들에게 보고하는 학술회의를 두 차례 가졌다”며 “조만간 유럽 및 한중일의 학자들과 다시 논의하는 자리를 가질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증도가자에 대한 국내 학계들의 논란 때문에 국제적인 회의를 미뤘으나 이제 논란이 종결됐으니 국제적인 인정을 받을 차례인 것이다. 현재 국내 학계에서는 증도가자를 국가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한 논의와 절차를 밟고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발명은 활자 인쇄였으며 그 중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를 주조하고 사용한 우리 조상들의 지혜와 뛰어난 솜씨는 가히 세계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남권희 교수는 “직지심체요절을 통해 우리나라 금속활자의 우수성을 보여줬지만 금속활자 실물이 없어서 아쉬웠다“며 ”하지만 이제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인 증도가자가 발견됐으니 우리나라의 우수한 금속활자 문화를 확실히 증명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윤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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