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곤(공법ㆍ전강)

  두 남녀가 만나 서로 부부가 되기로 약속하고 원앙처럼 살고 있어도 혼인신고라는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은 경우 사실혼이라는 법률관계에 놓이게 된다. 혼인신고된 법률혼만을 보호하는 우리나라와 같은 법률혼주의 국가에서는 사실혼관계는 일방 당사자의 의사에 의해 불합리하게 해소되더라도 다른 당사자가 보호받을 수 없는 불안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는 것은 잘 아는 사실이다.
  이제는 서로 침략하지 말고 교류하여 궁극적으로 통일로 가자는 남북간의 합의서가 체결ㆍ발효되었다. 그간의 양측간의 대립상황을 고려하면 통일에의 큰 진전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 합의서의 체결ㆍ발효과정에서 보여준 양측의 이 문서에 대한 성격규정은 통일로 가는 길을 결혼에 비유할 때 사실혼관계와 같이 합의이행에 의지를 의심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아 아쉽다.
  양측은 이 문서가 국제법상의 조약이 아님을 분명히 하기 위한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 국호를 사용하지 않고 남과 북이라는 비법률적 용어를 사용하였고 헌법에 규정된 국회동의를 통한 조약의 비준절차를 밟지도 않았던 것이 그러한 일례이다. 하지만 국제법을 전공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 문서가 국제법상의 조약이 아닐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일반적으로 어떠한 합의가 조약이 되기 위해서는, 명칭은 어떤 것을 사용하든, 주로 문서의 형식에 의하여, 능동적 국제법주체간에 이루어진 국제법에 의하여 규율되는 의사의 합치가 있어야 한다고 한다. 이렇게 볼때 합의서라는 통상적인 국제조약에서 잘 사용되지 않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이 문서가 조약이 되는 것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또한 문서로 작성되었다는점, 그 규율법규가 국제법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점, 의사의 합치가 있다는 점도 분명하다. 양측이 조약으로 성격규정하는 것을 피한 이유는 결국 능동적 국제법주체간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문서작성의 주체문제라고 생각된다. 즉, 상대방의 국가로서의 존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고, 양측의 국내법상 그러한 인정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국제법시각으로 볼 때 엄연한 국제법주체들의 합의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또 국가라는 완전한 국제법주체성을 상대방에게 인정하지 않는다 해도 제한적인 성격을 갖는 소위 교전단체로서의 지위는 인정될 수 있고 이들 교전단체와의 합의도 조약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 그 이행보장을 위해서는 합의서는 조약으로 취급되어야 한다고 본다. 합의서 자체에는 이행보장수단을 규정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합의서가 조약으로 성격규정되어 이의 이행이 기존 국제법체계에 맡겨지지 않을 경우 사실혼처럼 양측의 자발적 이행에만 의존하는 불안정한 법적 상태가 되는 것이다. 남북이 모두 회원국으로 되어 있는 국제연합헌장은 회원국이 체결한 조약의 등록 및 공표를 규정하고 있어, 이 경우 이 기관을 통한 이행보장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원만한 부부관계에서 법이 작용할 여지는 적다. 하지만 그 관계에 금일 갈 때를 대비해서는 법이 필요하다. 남북합의서는 양측의 자발적 성실이행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려운 상황을 대비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합의서를 조약으로 취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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