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위기'론의 배경

1980년대 중반, 소련에서의 페레스트로이카의 시작과 더불어서, '현실사회주의'사회들 및 사회주의 세계체제의 위기가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이로부터 동구권 나라들 및 소련이 심각한 정치경제적 위기가 더욱 뚜렷하게 노정되고, 이에 대응한 변화의 몸부림이 전개되어 갔다. 급기야 소련방은 와해되었고, 사회주의 세계체제는 거의 해체되다시피 이완되었다. 이 심대한 변화과정이 아주 숨가쁘게 전개되어 갔다. 반대편에서는, 오랜 냉전체제 속에서 사회주의 나라들과 대립ㆍ경쟁 관계를 유지해왔던 자본주의 나라들(특히 제국주의 나라들)의 부르주아지가 반사이익을 누렸다. 개별 자본주의 나라들 및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고유한 모순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가 상대적으로 우월하는 관념이 유포됨으로써, 그 모순들은 은폐되거나 불가피한 것으로 여겨지게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현실은, 유물론의 가르침 그대로, 어떻게든 사람들의 관념속에 반영되게 되었다. 여기에서, 맑스주의가 사회주의와 동일시되고, 그 사회주의가 곧 '현실 사회주의 사회'속에서 존재해왔던 '사회주의'와 동일시되어 오기도 했던 것이 저간의 무시할 수 없는 관행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현실이 '맑스주의 위기'로 인식되게 되었던 사정은 일용 충분히 이해됨직한 일이다. 그리하여 맑스주의의 안팎으로부터 다양한 유형의 '맑스주의 위기론'내지 맑스주의 비판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2.'위기론'과 '소멸론'

'맑스주의 위기론'은 '위기'를 야기시킨 오류의 근원을 어디에서 찾는가에 따라서, 몇 가지 큰 유형들로 나뉘어진다. 어떤 이들은 맑스주의 이론이 아닌 실천과정에서 오류의 근원을 찾는다. 이와 같은 설명의 배경에는 이론속에서 제시되고 있는 사회주의는 현실 사회주의 사회들에서 시도되었던 사회주의와는 다른 그 무엇이며, 그것은 인류의 전망으로서 여전히 유효하다고 하는 판단이 깔려 있다. 조금 더 나아가는 이들은 스탈린에 의한 맑스-레닌주의로까지 소급해서 오류의 근원을 찾아 내고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맑스주의의 창설자인 맑스 자신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그의 이론에 이미 나중의 맑스주의자들이 답습하게 된 일부 근본적인 오류들이 내재되어 있지나 않았나 의심한다. '위기론'의 이 유형들 중 나중에 거론된 것일수록 맑스주의에 대한 심대한 비판을 내재시키고 있다.
'위기론'의 유형들이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맑스주의라고 불리는 대상의 일부 측면들이나 경향들을 문제시 하는데에 반해서, 아주 극단적인 논자들을 맑스주의는 부분적인 오류들만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송두리째 적실성이 없음이 입증되었다고 결론짓는다. 이 결론은 곧 맑스주의가 단순히 '위기'를 맞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완전히 소멸해 버렸다고 단정하는 '맑스주의 소멸론'이다. 그것은 맑스주의의 여러 흐름들과 그것들 속의 여러 측면들 전체에 대한 일괄적이고도 최종적인 사망선고인 셈이다. 종래 맑스주의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을 취해 왔던 일부 비 맑스주의 지식인들이 이 사망선고에 열을 올리는 것은 비록 그들이 내세우는 선고 근거들의 모기록중에 현실 사회주의의 좌절이라는 항목이 추가되고 이에 힙입어 그들의 목소리도 좀 커졌다고는 하더라도 전혀 새로울 것도 신기할 것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일부 맑스주의자를 자처해 오던 이들조차도 '위기론'을 넘어서 이 사망선고에 동참하면서 '과감한'새 출발을 선포하는 모습은 과연 '위기'가 그리 만만치만은 않은 것임을 보여준다.

3. '소멸론'및 부적절한 '위기론'의 확산에 대한 대응의 필요성

과학으로서의 맑스주의에 대한 사망선고가 전혀 근거 없는 것이고 또 맑스주의 비판이 확산되는 것은 당연히 매우 바람직하지 못하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인류의 값진 지적자원의 일부를 송두리째 폐기하거나 평가절하하게 관행을 유포시킴으로써 과학적 사회이론의 발전은 물론, 사회 전체의 발전까지도 저해하는 심각한 해악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선고와 비판이 확산된다면 그것은 앞에서 알아 보았던 '위기론'의 유형물에게 제시되었던 위기요인들과는 질적으로 구별되는 위기요인으로서 작용하게 된다. 그것은 맑스주의 자체의 과학으로서의 무용성이나 결함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맑스주의 고유의 풍부한 과학성을 부당하게 부인 당하게 됨으로써 추가되는 현실적인 위기요인이다. 그렇다면 맑스주의자들은 변화한 물적현실에 더하여 맑스주의에 대한 각종의 부당한 이데올로기적 공격들에도 직면하게 되는 셈인데 이와같은 현실적 이데올로기적 상황에 올바르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의당 맑스주의 자체및 그것에 대한 비판들의 적실성에 대한 개방적인 자세에서의 꼼꼼한 검토가 요청되게 된다. 그러나 바로 이 글에서 이와 관련되는 여러 측면들을 상세하게 검토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여기에서는 오히려 이와같은 검토를 인도할 과학적 지침이 오직 맑스주의의 과학론으로 부터만 주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질 것이다.

4. 검토의 지침을 제공하는 맑스주의 과학론

콘스탄티노프는 맑스주의의 구성요소들을 변증법적 유물론, 사적 유물론, 자본주의 정치경제학, 사회주의 정치경제학, 과학적 공산주의론등의 다섯 가지로 대별하고 있는데, 이는 물론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여기에서 맑스주의의 한 체계는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매우 뚜렷한 철학적 입장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점을 강조해 둘 필요가 있다. 이는 소멸론자들과 고장된 위기론자들이 요란스럽게 소멸과 위기를 떠들어 대면서도 맑스주의의 전체계의 기초가 되는 이 핵심 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적절한 공격을 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에 의하면 궁극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더 이상 의문의 여지없이 그 자체로서 감각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물질세계 그 자체이다.
여기에서는 인간 역시 물질세계의 오랜 진화과정의 소산으로서 생겨난 것이라고 취급된다. 물질세계는 부단히 변화하는데, 그 과정은 '변증법적'이라고 불리는 과정이다. 맑스주의에 있어서 과학활동은 그 자신 물질세계의 진화과정의 소산인 인간이 자신까지도 포함하는 물질세계의 구성과 변증법적 변화과정의 전모를 알고자 하는 지적 활동이다. 이 지적 활동은 대상세계 그자체의 모습을 올바르게 반영'하는 것이어야 하고, 그러한 한'과학'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을 수 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맑스주의에 있어서는 과학적 자신의 '객관성'을 판정하는 기준은 그것이 과연 대상세계의 전모를 올바르게 반영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는 대상세계 그 자체(칸트 식 용어로는 '물 자체')에 대한 파악을 포기하고, 현상계에서 관찰되는 제일적인 관계들을 파악하는 데에 과학의 임무를 극한시키면서, 객관성의 기준을 '동일한 절차를 택했을 때 다른 사람들도 동일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개연성', 또는 '숙달된 학자들 사이에서 동의를 얻어 낼 수 있는 개연성'등으로 파악하는 관념론적 입장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흔히 오해되고 있는 바와는 달리, 맑스주의는 형이상학적이지 않다. 맑스주의 역시, 경험과학이 그러하듯이, 대상세계에 대한 관찰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맑스주의자에 있어서는 그가 관찰을 통해서 얻게 되는 대상세계의 '현상되는 모습'은 대상세계의 일부 속성에 지나지 않는다. 대상세계는 자신을 형성하는데에 나름대로의 규정력을 가지고 참여하는 많은 요소들(거기에는 본질적인 것도 있고 비본질적인 것도 있다)과 그것들간의 관계들의 종합물이다. 현상이란 현상계의 이면에 존재하는 요소들과 그것들간의 관계에 의해서 형성되는 대상세계가 그 형성의 결과로서 우리에게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자신의 일부 속성(겉모습)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상은 이 요소들과 표리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대상세계의 '전모'를 알기위해서는 현상계에서만 맴돌수는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대상세계의 전모를 알기위해서는 그것의 형성에 참여하는, 그러나 직접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는, 요소들을 밝히고, 그것들 중 어떤것이 본질적이고 어떤것이 사소한 것인지도 밝혀야 한다. 나아가서는 요소들간의 관계도 밝혀야 한다. 본질적인 요소의 작용은 어떤것인지, 거기에 어떻게 비본질적인 요소들이 작용하여 본질적이 작용과 종합되는지를 밝히고, 이 종합물을 역시 대상세계의 일부인 현상형태와 관련시켜야 한다. 현상은 분명히 본질과 표리관계에 있는 것이지만, 우리에게 본질을 은폐하거나 왜곡되게 반영되게끔 할 수도 있다. 사소한 요소들의 작용에 미혹됨으로써 생겨날 수도 있는 이러한 은폐나 왜곡을 극복하고, 대상세계의 참된 전모를 알기위해서는 현상을 뚫고 본질을 파헤쳐야 한다. 맑스주의자에 있어서는 그것이야말로 과학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맑스의 말처럼 "현상형태가 직접적으로 본질과 일치한다면 과학은 필요없다"현상이면의 요소들과 그것들간의 관계들을 파헤치고, 그것을 최종적으로 현상형태와도 관련지우는것, 그럼으로써 대상세계의 전모를 객관적으로 대상세계의 전모를 객관적으로 알게되는 것, 그것을 맑스주의에서는 '총체적파악'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요소들과 관계들을 도대체 어떻게 알 수 있다는 말인가? 맑스는 이 질문에 대해 '추상력(Abstraktionskraft)이 동원되어야 한다고 답한다. 그러나 물론 올바르지 못한 추상은 공허한 관념들을 낳을 뿐이다. 올바른 추상을 위해서는 풍부한 관찰과 자료들의 설렵을 통해서 "소재를 상세히 자기것으로 소화하고 그것의 다양한 발전형태들을 분석하고, 그 내적 연관들을 감지해야 한다"고 맑스는 말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도달하게 된 대상세계에 관한 총체적인 지식이 진실로 객관적인 지식(대상세계의 올바른 반영)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맑스주의는 그것이 오직 실천(Praxis)을 통해서만 검증될 수 있다고 말한다.
맑스주의 철학에서 '실천'은 각별한 중요성을 갖는다. 실천은 인간과 대상세계를 관련지우는 인간편에서의 활동인데, 인간은 이를통해서 대상생세계와 자기자신, 그리고 양자간의 관계를 변혁해가며, 이로써 역사창조의 주체가 된다. 인간은 변혁을 지향하는 실천적 욕구로 인해서 과학이라는 지적활동을 하게되고, 실천을 통해서 대상세계에 관한 과학적지식을 얻고, 이지식에 따라서 그 지식의 진위를 객관적으로 판정받는 과정을 거듭한다. 이것이 맑스주의에서 말하는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다.
이상이 변증법적 유물론에 기초를 두는 맑스주의 과학론의 핵심적인 내용들이다. 사적 유물론은 역사에 관한 그런 의미에서의 과학적 해석이며, 자본주의 정치경제학, 과학적 공산주의등도 각각의 대상에 관한 그런의미에서의 과학적 설명들로써 공언되어 왔다.
맑스주의의 전 세계의 기초를 제공하는 이 과학론에 대해서는 아직 어떠한 유력한 비판도 제기된 바 없다고 할 수 있다. 제법 설득력이 있어 보이던 비판들도 이내 훨씬 더 설득력있는 반비판에 부딪쳐 좌초해 오곤 했다.
간혹 시도되는 그들의 공격은 그들의 머리 속에서 잘못 파악된 맑스주의 과학론에 대한 공격이기가 일쑤이며, 이는 바로 이 과학론이 맑스주의 자체내의 다른 요소들 및 소멸론자나 위기론자들의 견해들의 적합성 여부를 검토함에 있어서 적용되어야 할 가장 유용한 과학적 지침들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5. 발전의 계기로서의 위기

맑스주의 과학론이 제공하는 지침들을 가지고 검토할 경우, 맑스주의 자체의 다른 요소들이 갖는 문제점들은 가장 정확하게 파악될 수 있다. 현실 사회주의 사회들은 좌절은 이 사회에서의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의 실천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군말 없이 보여준다. 나아가서 그것은 스탈린주의적 속류화에도 오류가 있었으며, 레닌 시대에 적합성을 갖는 것처럼 보였던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론'이 오늘날과 같이 변화한 상황 속에서는 더 이상 원형대로는 적합성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도 증명한다. 그것은 특히 사회주의 정치경제학과 과학적 공산주의론이 심각하게 재검토되어야 함을 증명한다.
도대체 왜 이와 같은 오류들이 생겨난 것일까? 그것은 맑스주의 과학론의 중요한 요청, 즉 현실의 지적소화, 이론과 실천의 통일성의 유지등을 등한히 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현실과의 대면을 통해서 끊임없이 그 내용을 풍부히 해나가야 할 이론이 화석화ㆍ도그마화하고, 그것이 권위주의에 의해 뒷받침되어 음으로써, 것은 자체 논리에 의해서 발전해 가는 현실과는 멀리 동떨어져 버린 관념 덩어리로 전락해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 맑스주의는 분명 위기를 맞고 있지만, 이 위기는 그것을 소멸로 몰아 갈 위기는 아니다. 이 위기는 맑스주의에 대해 자신의 과학론이 원래 요청하는 역동성을 회복해야 할 과제를 안겨준다. 이 역동성의 회복을 통해서만 맑스주의는 여러요소들 중에서 전승, 발전시켜야 할 것과 폐기, 수정해야할 것들을 식별해 낼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소멸론이나 각종의 과장된 위기론과의 이데올로기 수준에서의 투쟁에서도 확고한 승리를 거둘 수 있다. 그러므로, 맑스주의 고학론의 기초개념인 총체성 개념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포스트 맑스주의가 자기 식대로 잘못 평가한 맑스주의에 대해 헛발길질을 일삼고 있는 이 상황, 그것이 또 다수의 독자들에게 혼란을 가져다 주고 있는 이 상황, 그것이 또 다수의 독자들에게 혼란을 가져다 주고 있는 이 상황, 그것은 분명히 위기의 상황이기도 하지만, 원래의 건강성을 되찾게끔 추동하는 상황이기도 한다. 요컨데 맑스주의의 현재의 위기는 좋은 계기이며, 발전의 길을 모색하는 데에 있어서의 요체는 맑스주의 외부로부터의 근거없는 비판이나 공격에 저신을 빼앗기지 않고, 차분히 맑스주의 자신의 과학론이 원래부터 요청하고 있는 역동성과 건강성을 회복하는데에 있다.
 

박노영(사회·부교수)

저작권자 © 충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