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최후의 욕망

 
  ‘죄 화형식’을 한 적이 있다. 살면서 지은 죄를 종이에 적어 십자가에 못 박은 뒤 불에 태우는 의식이다. 빨간 불꽃으로 사라지는 죄를 보면서 새롭고 반듯한 삶을 다짐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없어진 건 종이와 십자가 뿐이었고, 삶은 변하지 않았다. 그건 그냥 불놀이였다.
  부활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선해지기 위해서는 악이 무엇인지를 구분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지난한 과정 끝에 악을 없애고 선하게 되는 방법을 발견하는 것이다. 『부활』이 두 권의 방대한 양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야기는 네흘류도프가 자신의 하룻밤 유혹으로 인해 파멸한 마슬로바의 판결에 배심원으로 참가하면서 시작된다. 유죄판결을 받는 마슬로바에게 깊은 양심의 가책을 느낀 네흘류도프는 그녀의 무죄를 변호하고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심한다. 그의 마음 속에 잠들어 있던 신이 마침내 눈을 뜬 사건이었다.
  마음 속의 유혹자가 말했다. ‘자신을 끌어올려 좀 더 나은 인간이 되려고 얼마나 여러 번 애써보았던가. 하지만 아무것도 된 게 없지 않은가? 너뿐만이 아니다. 누구나 다 마찬가지다. 산다는 건 다 그런 것이다.’ 그러나 유일하게 진실하고 힘이 있으며, 영원하고 자유로운 정신적 존재가 네흘류도프의 마음 속에서 움트고 있었다. 그는 거부할 수 없었다.
  주어진 세계에서 만족하며 사는 이에게 세상은 평화롭다. 정의와 선으로 다시 태어나려고 하는 이에게 세상은 고통스럽다. 네흘류도프도 마찬가지였다. 오랫동안 잊었던 삶의 정화(淨化)를 기도하고 눈물을 흘리던 그날 밤의 감격은 아침 해가 비추는 먼지에 가려져 버렸다. 그의 하루는 이제 물음으로 시작해 물음으로 끝난다. 거리에는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행인들에게 구걸하는, 얼굴이 부석부석한 남자와 여자가 있다. 왜 이 사람들이 여기에 모여 있을까? 그가 매일 대하는 교도소 소장은 법과 질서를 위해서 무고한 사람을 가혹하게 대하는 선량한 사람이다. 왜 이래야 할까? 그는 일해본 적이 없는데 그의 농부들은 한평생 일해도 가난하다. 어떻게 그럴까?
  톨스토이의 대표작인 『부활』은 19세기 러시아의 불합리한 사회 구조에 대한 날선 비판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전혀 낯설지 않은 문제들이다. 답은 쉽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치열하게 묻는 만큼 악과 선이 구분되는, 부활로 가는 과정이다.
  화형식은 없다. 그렇다면 악을 없애고 선을 찾는 방법은 무엇일까? 네흘류도프는 마침내 마태복음의 5가지 계율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소설가 이정희의 말대로 ‘살아가는 일의 쓸쓸함, 이해하기 힘든 세상의 고통과 슬픔에 관한 궁극적인 물음’이다. 그러니까 사실은 시 한 수든 술 한 잔이든, 세상에 대해 궁극적으로 물어보는 다양한 길이 모두 부활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시작은 나와 타인에 대한 사랑에서부터다.                          
 

박기령 대학원생기자silverlove7@gmail.com

저작권자 © 충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