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흑인폭동으로 드러난 미국 민주주의의 본질

  경제성장, 허위의속 인간본질왜곡

  ○ㆍㆍㆍ미국 사회를 뒤흔든 이번 흑인폭동은 미국내부의ㆍㆍㆍ○
  ○ㆍㆍㆍ계급갈등구조의 심각성과 함께 미국식 민주주의 실ㆍㆍㆍ○
  ○ㆍㆍㆍ상이 형식적인 평등에 기초하고 있는 구조였음을 보ㆍㆍㆍ○
  ○ㆍㆍㆍ여주었다. 이러한 측면을 우리신문에서는 두차례로ㆍㆍㆍ○
  ○ㆍㆍㆍ나누어 이번호에서는 '미국 민주주의의 본질'을 분석ㆍㆍㆍ○
  ○ㆍㆍㆍ해 보고 다음호에서는 '미국내 민권운동'을 살펴보면ㆍㆍㆍ○
  ○ㆍㆍㆍ서 그동안 미국이 제3세계에 개입하는 고리로 작용한ㆍㆍㆍ○
  ○ㆍㆍㆍ'민권문제'가 더이상 제국주의의 침략본질을 은폐하는ㆍㆍㆍ○
  ○ㆍㆍㆍ수단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사회 민권실ㆍㆍㆍ○
  ○ㆍㆍㆍ상에 시사하는 바를 알아보고자 한다.ㆍㆍㆍ○
  ○ㆍㆍㆍ<엮은이 밝힘>ㆍㆍㆍ○

  갑작스런 LA흑인들의 폭동으로 미국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있다. 민주주의국강서 경찰이 시민을 집단폭행하고 양식이 있어야 할 배심원이 무죄를 선고하고, 또 흑인들은 그들의 인권침해에 대한 저항의 표시를 한인 소상점을 약탈ㆍ방화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참으로 혼란스러운 지경이다.
  어떠한 현상에 대한 이해는 각자의 가치관-신념체계-에 따라 다양할 수 있는 것이다. LA흑인폭동을 한낱 흑인의 한풀이로, 더 심하게는 한국인의 흑인에 대한 푸대접의 결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적 이해는 결코 1965년 Watt흑인폭동이나, 마이애미 흑인폭동 그리고 상시화된 백인의 흑인에 대한 폭력행사를 본질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 사회 미국

  미국이라는 사회를 살펴보는데 있어서 우선적으로 상기해야 될 것은 미국은 자본주의 국가라는 점이다. 자본주의의 가장 축약된 정의는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와 생산의 사회화"이다. 생산수단의 소유여하에 따라 사회관계가 출발되는 것이다. 생산수단을 소유한 극소수의 부르조아지는 생산수단을 소유치 못한 대다수 임노동자들의 생산물을 착취하여 하부구조는 물론 상부구조 전부독점하여 사회를 부르조아지의 이익에 봉사케 이끄는 사회가 바로 자본주의사회인 것이다. 결국 미국은 자본지배의 논리가 철저히 관철되는 사회이고, 이러한 자본주의 국가는 보편적으로 통치이데올로기로서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ㆍ평등을 보장한다는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을 표방한다.
  모든 정치제는 인민의 동의에 기초하는 것이고, 각 개인은 자아실현과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해 분투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신분적ㆍ정치적으로 동등한 인격체로서 역사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은 결론적으로 자본주의의 기본모순을 포장하는 허위의식이다.
  타협과 동의라는 정치이념은 자본으로 매개되는 지배ㆍ피지배의 계급갈등을 위장시킨 것이고, 신분적ㆍ정치적 평등의 이념은 경제적 속박을 포장하는 것이다. 즉 노예나 농노의 신분이 임노동자라는 해방의 모습으로 발전되었지만, 그것은 여전히 자본으로인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인 것이다. 이러한 연관선상의 두가지 미국사회의 본질을 이해함으로써, 미국민주주의의 현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되는 것이다.

  만연한 정치허무주의

  미국은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해 구성된 입법부의 대통령ㆍ사법부의 삼권이 상호 견제를 행하는 대의제 민주국가이다. 이러한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결론은 레닌이 갈파하듯 형식적 민주주의인 것이다. 인민의 진정한 의지를 투영하기보다는 부르조아지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대의제 민주주의의 본질인 것이다. 생산수단소유에 따라 인간관계가 결정되는 자본주의에 있어 금권정치로 대표되는 독점재벌의 권력전취는 당연하다. 독점자본가의 이익에 봉사한다는 것은 다수 인민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고, 모든 기득권을 유지한 자본가의 이익에 반하여 정치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가장 가까운 예로 LA흑인폭동 과정에서 한인의 집중적 피해와 백인정부의 방관에 가까운 정도는 한인이 정치권에 전혀 참가할 수 없었고, 따라서 한인의 정치적 이익은 보장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독점자본에 의한 정치권의 장악은 인민에게 정치적 효능감을 감소시켜 정치적 허무주의를 확산시킨다. 미국에 있어 다수의 인민은 자본가의 지배를 위한 정치적 객체로서만 의미있는 것이다. 정치라는 것은 사회구성원의 참여와 활동이 있으므로써 시작되는 것인데, 미국의 자유민주주의는 자본지배의 논리에 따르는 것이기에 다수의 무지와 허무위에서 소수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

  부활하는 노조운동

  정치면에서의 철저한 소외속에서 그래도 미국이 유지되는 것은 천혜의 자원을 기초로한 경제적 환상때문이다. "소비가 미덕이다"라는 미국식 논리가 말해주듯 미국은 최고의 경제단위이다. 1939년 경제대공황 이후 자본주의 고유의 불황과 활황의 연속속에서도 미국은 엄청난 경제성장을 유지하였다. 그러한 경제성장은 사회복수준의 향상으로 연계되어 현재 경제 총생산의 20%정도가 사회보장제등을 포함한 전체 복지비에 지출되고 있으며 3천8백만명이 사회보장제의 혜택을 받고 있을 정도이다.
  이러한 사회보장제의 유지를 위한 사회적 비용의 증대는 연방정부의 만성적 적자를 야기시켰고, 이러한 문제는 경제정책 실패에 의한 안정기조 붕괴로 서서히 갈등의 소지가 증대되고 있다. 부유해지는 사람은 생겨도 가난해지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미국의 논리는 이제 한계에 다다른 것이고, 그것은 80년대 레이건노믹스가 표출했듯, 독점자본가의 이익에 더 충실해지는 자본주의의 본연적 경로로 들어서는 것이다.
  경제상황 악화와 그에 따른 사회보장제의 악화, 그리고 자본가 이익에 철저한 경제정책이 결과하는 것은 결국 노동계급에 의한 투쟁의 시작일 것이다. 가장 선진적 투쟁을 전개했던 미국의 노조가 부활한 것이다.

  WASP, 인종우월의 사고

  미국은 다민족연방국가이다. 다수의 인종ㆍ종교ㆍ언어가 혼재된 국가인 것이다. 이러한 갈등의 소지를 미국은 부의 증가와 획득기회보장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즉 사회갈등의 원천인 지리ㆍ민족ㆍ인종ㆍ종교 그리고 인구 분포상의 변화등을 부의 증가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어왔던 것이다. 공공시설의 흑백격리는 1964년 민권법이 발효될 때까지 합법적이었고 현재까지 인종차별정책은 그 정도가 약해졌을 뿐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LA폭동의 도화선인 로드니 킹의 구타사건이 무죄판결되면서 촉발되었듯 여전히 인종차별, 다시말해 WASP중심의 미국사회는 조금도 변함이 없다. 타 연방국가가 정치ㆍ문화ㆍ사회적 동화라는 접근법을 취한데 비해 미국은 인종우월중심의 사고에서 경제적 부의 증대로 해결하려하였던 것이고, 그것이 경제상태의 한계상황에 이르러 본질적 갈등을 표현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종ㆍ민족간의 갈등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자본주의의 본질문제와 연관된 인간성상실과 그에 따른 사회병리현상의 증대와 관련된다. 인간의 본질은 유적본질과 사회적 본질이라는 두개의 성격을 갖는다.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는 생명체적 본질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얘기하듯, 사회적 관계의 본질이라는 양면이 존재한다. 유적본질로서의 인간은 생명체로서의 인간이 멸종되지 않는 한 상실될 수 없겠지만 사회적 본질로서의 인간은 자본주의하에서 상실되어져가고 있는 것이다.
  마약ㆍAIDSㆍ살인등의 비인간적 사회병리현상은 자본에 의한 인간의 왜곡과 인간소외의 결과이다. 자본주의하에서 더 이상 생산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인간과 인간간의 관계는 오로지 자본의 유무에 따라 결정되고, 인간노동에 의한 생산물은 자본소유자에 귀속되어 생산물에 의한 인간소외가 나타나게 되고, 그것은 인간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사라져가는 인간의 본질

  물론 자본주의하에서 일정정도 노동자는 삶의 질과 양에있어 보수화될 수 있을만큼 혜택을 누리고 있다. 이러한 경제적 혜택의 증가만으로 인간삶의 본질적 욕구가 충족될 수 있을까. 풍요속에서 만연하는 심리적 빈곤감과 상대적 박탈감, 그리고 자신의 효능감을 상실한 채 인간은 파편화되고 원자화되어 존재의미마저 위협받고 있는 삶이 자본지배에 억눌리고 있는 인간의 모습인 것이다. 자본주의는 인간에게 노동강도의 증가와 경쟁의 강화를 조장하고 이러한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나면 그것은 실업과 기아 그리고 거기에 수반되는 인간적 삶의 왜곡을 조장한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언급된 "생활양식론'에 주목해야할 필요성이 대두되는 것이다.
  각 역사 시기의 인간본성을 투영하는 생활양식론에 있어 자본주의하에서는 경쟁과 탈락, 일상화된 심리적 압박감, 인간 개개인의 정치적 효능가 상실등이 만연되어, 사회병리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노동의 창조성은 과학기술 혁명속에서 전멸되고, 일상의 모든 부문은 상업화되어 인간 본성의 구조 즉 자의식과 자기를 반성하는 의식이 왜곡되어 진다.자기반성적 의식이 물적욕구로 전환됨으로써, 퇴폐적 쾌락에 몰입하게 되는 것이다.

  지속될 수 없는 '미국신화'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하면 미국은 자본지배의 국가이고 따라서 자본가의 지배를 영속시키기 위하여 자유민주주으라는 허위의식을 조장하여 왔고, 그것은 천혜의 자원에 기초한 무한한 부의 증가로 일정정도 성공하여 왔다.
  그러나 현재적 의미에 있어 미국은 경제번영의 환상이 깨지면서 자본주의 국가가 태생적으로 갖는 한게를 노정시키고 있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한계상황은 또한 백인중심의 인종차별과 종교차별등의 사회구조와 관련되어 복합적인 형태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독점자본가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대다수 인민은 정치적 허무주의속에서 신음하는 것이고 그것은 자본주의 발달의 기초인 인간의 창조적 노동의 절멸을 가속시키는 것이다.
  인간에 기초하지 않았던 스탈린식 사회주의가 붕괴되었듯이 인간을 생산주의의 일부로 파악하는 자본주의는 그 경제적성장과 허위의속에서도 인간본질의 왜곡으로 인해 붕괴될 것이다. 이제 더이상 미국의 신화는 지속될 수 없는 것이며,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와 자본의 지배가 더이상 인간을 왜곡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신성규(정외ㆍ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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