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문학상

  추억

  따뜻한 이불속은 지나치게 포근하고 아득하여 무덤같은 생각이 든다. 나는 꿈지럭 거리지만 그건 습관일뿐 깨어나려는 것은 아니다. 오래고 무의미한 싸움끝에 늦잠은 내 생활의 원칙이 되어 버렸다. 깨어있기는 하나 아직은 몽롱한 의식 속에서 아마도 헛되게 끝날 철지난 계획과 결심들을 곱씹거나, 달콤하고 때로는 현실과 구별되지 않는 몽상에 젖는 즐거움은 규칙적이고 도전적이 되려는 대낮의 결심과의 싸움에서 결코 지는법이 없다.
  그러나 가끔 이런 순간이 있다. 가족들이 아직 곤한 잠속에 빠져있고 푸른 안개짙은 여명이 휘황한 가로등 주변에서 빛을 잃고 있을때, 아파트 창문 밖으로 보이는 도로는 아무도 눈에 띄는 사람이 없는 이른 새벽에, 갑자기 화들짝 놀라 깨어날 때가 있는 것이다. 이상스럽게도 그런 수간에 흔히 잠을 설친 뒷끝에 다가오는 두통이나 멍한 의식 그리고, 나른한 육체가 갖는 달콤하고 피곤한 감정 등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더욱 밝아진듯한 시력과 함께 숙면뒤의 상쾌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원인은 언제나 한가지, 나 이외 다른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 동일한 내용의 꿈이며 또한 과거의 일화이다.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가을이 깊어가며 물들었던 단풍들의 탈색에서, 무성했던 나뭇잎들의 낙하 속에서, 그 초췌한 본색을 들어낼 때쯤 나는 고교 시절의 마지막 축제를 맞게 되었다. 개교기념일을 전후하여 3일간 수업을 전폐하고 벌어지는 축제는 고교축제 특유의 미숙하고도 수선스러운 분위 속에 이뤄지기 마련이고, 이상스럽게 관대해진 선생님들은 평소같으면 생각도 못할 학교내에서의 음주, 노숙들을 공공연히 묵인해 주시는 것이었다. 1학년들에게는 처음맞는 축제에 대해 설렘, 2학년들에게는 내년엔 수험생이라는 불안감에 더해 축제중 찾아을 떠들썩하고 적개심없는 호의에 가득찬 분위기, 그리고 축제가 끝난후의 턱없이 방탕한 모임들, 이 모든 것들에 대한 불안과 기대로 후배들은 들떠있었다. 나는 그들을 독려하고 비록 내키지는 않는 일이나 그 준비를 도와주기 위해서 축제 전날을 학교에서 새웠다.
  익숙치 않은 술과 피로로 흐려진 정신이 새벽의 차가운 공기에 맑아지는 듯했다. 주위는 아직 캄캄했고 불야성을 이룬 지상의 풍경에도 불구하고 별들은 드물게 또렷했다. 강남전역을 굽어보는 돌산을 깎아내고 지은 학교는 산 아래 유서깊은 사찰의 원성을 얻은 대신 훌륭한 전망을 얻어냈다. 나는 그 전망을 천천히 완상하며 학교를 둘러싼 도로를 다라 걷고 있었다. 새벽 공기가 폐를 차갑게 자극하기 시작하는걸 느꼈다. 심호흡을 하자 가슴에 유리 조각이 부서져 박히는 듯한 통증이 왔다. 가로등 주변에는 아직도 벌레들이 날고 있었고 포장한 길바닥 길바닥에는 죽어가는 벌레들이 단말마의 날개짓으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길을 따라 걷던 나는 평소 눈에 듸지 않던 오솔길, 교장 사택을 기고 도로를 벗어나 숲속으로 향하는 작은길을 발견했다. 숲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지는 나는 이제 얼마 후면 규율을 어기고 싶어도 그럴수가 없다고 멋대로 생하하고는 그 길로 들어섰다. 소나무가 우거진 사이를 뚫고 지나 작은 모퉁이를 돌아선 나는 뜻밖에 저망이 확 트인 작은 공터를 발견했다. 위로는 사택이 보이고 사택 정문에 서있는 가로등은 주변 사물의 윤곽들을 뚜렷이 비추고 있었다. 주위에 서있는 키 큰 풀들의 그림자는 너무도 선명하여 손을 댄다면 베일 것 같았다. 나는 가운데 놓여있는 넓은 바위에 걸터앉아 담배는 벗어놓고 온 웃옷에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래로 펼쳐진 강남의 남쪽절반, 먼뎃 산들이 둘러사고 넓직한 8차선 도로들이 관통하는 그곳에는 가끔 멀리서 차들의 경적이 울려왔고 얼어버린 어둠처럼 굳건히 솟은 고층건물들은 건물의 끝에서 빨간 불들을 깜빡이고 있었다. 바람은 그 모든 것들을 스치고 산발치를 지나 내눈을 싸아하게 한후 주변에서 나뭇잎들을 말아올리며 작은 회오리들을 만들고 있었다. 나뭇잎들은  가끔씩 쏴아 하는 소리를 내며 파도치듯 일렁였지만 내게는 한없이 빈약하고 초라한 것으로만 들렸고 아직도 붉고 푸른기운이 가시지 않은채로 떨어진 낙엽들을 썩기 시작하며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다시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은 그것들을 말아올리거나 뒹굴게 하면서 내 귓가를 차갑게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왠지 서글퍼졌다. 권력과 힘의 의지는 무역센타 빌딩으로 남근처럼 솟아오르고 멈출수 없는 욕망들은 혈관처럼 그것들을 감사고 있었다. 이 황막한 곳, 강남으로 이사와서 처음 이것들을 보았을 때의 그 쓸쓸함. 바로 이 산위에서 언젠간 저것들의 주인이 되리라.
  혼자 다짐했던 일 그리고 기대했었던 고교시절의 와중 내가 만나게 된 예기치 않았던 실망과 환멸들. 내가 그토록 원했던 가치들의 무너짐들이 한꺼번에 떠올라왔다. 나는 공연히 주위를 서성댔다. 나직히,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말들을 되새기며.
  그러던 나는 갑자기 발끝에 오는 통증에 화들짝 놀라 발을 옮겼다. 작은 나무를 잘라낸 그루터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들어서게 된 것들의 영역을 둘러보던 나는 누군가가 살뜰히 심어논 작은 소나무 묘목들을 발견했다. 황막한 주변의 풍경속에서 그것들은 그들의 푸르름을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있지 않은가?

  희망ㆍㆍㆍㆍ

  나는 수치를 느꼈다. 한 대 얻어 맞은듯. 대기는 어느새 여명으로 충만해 있었고 별들은 나뭇가지 위에서 빛을 잃고 해쓱하게 달아나고 있었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위에서 누군가가 찾는 소리에 나는 발길을 옮겼다. 형언할 수 없는 상쾌한 기분을 느끼며.
  추억이 아름다웠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가끔 본다. 추억만이 그들의 것인 사람들, 그밖의 어떤 것도 희망일 수 없는 가련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 말에 반박하고 싶어진다. 그저 추억이란 언젠가 내가 언젠가, 치기와 무모함에 가득차 있을지도 모르는 시대에 세계와 내가 나누었던 그저 그런 대화였고 다른 모든것들처럼 그것도 잊혀져 마땅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가끔 일상의 둔중한 회전속에서, 때론 아름답지만 변화없는 이 굳건한 생활의 쳇바퀴 속에서 나 자신을 잃어버릴 대, 박자를 놓친 자신을 잃어버릴 때, 박자를 놓친 쳇바퀴 속에서 나 자신을 잃어버릴 때, 박자를 놓친 쳇바퀴 속의 다람쥐처럼 그속을 헤매고 있을때 그 통증을, 짧았던 긴장과 깨우침의 순간을 다시 체험하고는 화들짝 놀라 깨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영혼 어디엔가 그 처연하고 쓸쓸했던, 그토록 삭막했던 순간들이 자리잡고 남아 나에게 계속 경고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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