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리우드적 감동-그 악어의 눈물

  "그는(스필버그)숙련되고 애정어린 대가의 전문기술을 통해 이미 잘 알려진 것, 진부한 내용을 다룬다. 즉 그의 작업은 다른 영화들로부터의 '인용들'로 가득차있다. 그 작품들은 한 학생인 영화 작업자가 그 영화들에 말할수 있는 영화에 대한 영화들이다"
  -잭 엘리스- A History of film

  '쉰들러 리스트'를 보기에 앞서 필자는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들을 다시 한번 감상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유는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마틴 스콜세지가 '쉰들러 리스트'를 그의 '케이프 피어'대신 만들뻔 했던 유니버셜사 내부의 우여곡절이 있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예상대로 '흥행의 귀재'스필버그는 특유의 헐리우드적 감동과 짜릿한 스릴이 가득한 화면으로 이 영화의 흥행을 보장해 주었고, 이미 나타난 반향은 그의 'ET'적인 아이디어(이를테면 '별들의 전쟁'에 익숙한 관개들에게 외계의 생물-또는 독일인-중에도 선의의 생물이 있을 것이라는)가 다시 한번 대중 심리의 허점을 찌른 셈이 되었다. 그러나 '쉰들러...'를 대하고 난 직후 필자는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들이 아른거렸고 그것은 이내 허탈한 아쉬움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두편의 영화

  나찌의 만행을 담은 뛰어난 영화 두편만 고르라면 말할 것도 없이 에이젠스타인의 '컴 앤 씨(come and see)'와 '소비의 선택(sophie's choice)'이다. 에이젠쉬타인은 '쉰들러...'의 전형을 이미 오래전에 '컴 앤 씨'에 담아 놓았다. 점잖게 얘기해서 '인용들'이라고 하는 스필버그의 은밀한 '훔치기'는 '컴 앤 씨'에도 미치고 있다는 혐의 때문이다. 스필버그 자신 또한 "유대인의 학살을 담은 영화는 흑백으로 밖에는 보질 못했고 책이나 화보도 마찬가지였다"는 영화 완성 이후의 만족한 감회에 젖은 고백이 뒷받침하듯, 이미 실험과는 무관한 '나찌의 광란'장면들은 '컴 앤 씨'의 그것을 자연스럽게 연상시킬만큼 닮아 있었다는 것이다.
  에이젠쉬타인은 '컴 앤 씨'에서 흑백의 실감나는 기록필름들의쇼트와 스틸의 이어쓰기로 스토리를 포함하여 스크린을 사이에 둔 감독과 관객 사이의 감정과 심리의 병치 또는 전이를 마치 그의 20년대 무성영화의 그것처럼 가능하게 만든다. 그의 이같은 몽따쥬의 실험과 미학은-나찌의 광란적인 인간사냥이 참혹하면 참혹할 수록 경쾌해지는 바그너 배경음악의 역설적인 정체를 확인하게 하는-떨리는 한숨과 눈물을 자아내게 한다.
  또 하나 알란 파클라의 '소피의 선택'은 '컴 앤 씨'와는 다른 분위기로 나찌의 만행을 그려내고 있다. 이 영화는 다른 '문제영화들'(Problem pictures)의 목청높은 천박한 리얼리즘을 극복함으로써 영화를 하나의 문예적 가치로 끌어올린다. 소피(메릴 스트립분)는 자신의 두 자녀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 둘중 하나만 가스실로 보내고 하나는 살려주겠다는 독일군 장교의 잔인한 자비(?)의 결과이다. 그럼으로써 소피는 두 자녀와 자신의 자아를 모두 잃었다. 알란 파클라는 이 영화를 통해 나찌의 만행은 나찌의 패망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음을 결코 높지 않은 목소리로 보여준다. 메릴스트립의 대리석처럼 창백한 연기도 일품이다. 시종일관 느와르 시대의 이미지를 흉내내다가 헐리우드류의 감동이 필요했던 스필버그의 상업적 계산 때문에 영화 막판에 스타일을 구긴 쉰들러 역의 니암 리슨의 배우적 운명과는 사뭇 다르다.
  결국 이미 있었던 '컴 앤 씨'와 닮은 꼴의 나찌의 만행에 관한 다른 영화가 필요했느냐는 것이다. 있었다면 헐리우드적 감동을 바탕에 둔 충격적인 학살장면을 담은 새로운 상업영화였을 것이고 그것은 헐리우드적인 신파에 중독된 대중의 주머니를 목표로 삼은 영화였을 것이다.

  낯익은 '훔치기'

  스필버그에게 '대중성을 극복한 대중적 실험'을 요구한다는 것은 무리이다. 마치 에이젠쉬타인에게 '인디아나 존스'와 같은 황당한 오락영화를 요구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다. '쉰들러...'에 대한 많은 호평에도 불구하고 야릇한 허탈감은 지울 수 없다. 칼라의 시대에 칼라를 거부한 흑백의 모험은, 그가 새로운 실험의 길로 들어선 것처럼 보일수도 있었을 뿐더러 그것은 곧 그의 새로운 영화미학에 대한 천착이 아닐까하는 기대를 갖게 할만한 시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무리한 기대였다는 결론이다. 영화를 흑백으로 밖에는 만들 수 없었던 시대의 흑백영화들을 조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스필버그의 흑백의 모험이 갖고있는 한계는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이다. 평이한 헐리우드적 연출과 액션, 어디선가 많이 본듯한 쇼트의 구도, 몇몇 쇼트의 비극적인 참혹함과 독일군 장교 괴트역의 랄프 피네스의 그로테스크한 심리적 연기 외에는 '간디'의 밴 킹슬리를 포함하여 단역들까지 그 액션의 분위기는 40년대와 80년를 좌충우돌 넘나들고 있다.
  결국 40년대 흑백 느와르의 모방, 각각의 시퀀스에서 '컴 앤 씨'를 연상시키는 '훔치기',낯익은 쇼트의 평이한 구도, 악어의 눈물(?)을 떠올리게 하는 헐리우드적 감동...그것이 '쉰들러 리스트'이다. 군중앞에 선 카메라의 위치와 그것을 담아내는 움직이는 카메라의 정교한 기교, 편집에서 보여주는 풀쇼트와 클로즈업의 병행적 연결이 주는 충격적인 영상도 새로운 것이 아니다. '독일인의 눈으로 본 나찌의 만행'이라는 아이디어가 오히려 스필버그적인 것이다. 어느것 하나 '컴 앤 씨'를 비롯한 또다른 영화들의 전형을 벗어난 것이 없다. 있다면 실험정신이나 미학에 우선하는 헐리우드의 상업정신이 장사이다. 만일 스필버그류의 진부한 감동 따위에는 처음부터 관심이 없는 마틴 스콜세지가 그대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면 흥행에서만큼은 스필버그에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UIP, 문화적 침략의 구체화

  UIP 직배는 영화산업의 빈익빈 부익부를 가속화하는 제국주의 경제학의 표현이다. 많은 자본의 투자가 필요한 영화제작에서 빈익빈 부익부는 예술적 장르로서 영화적인 요소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그것은 곧 헐리우드의 거대화, 반대로 한국영화의 몰락을 결과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또한 농산물 전면개방에 못지많은 문화적 침략의 구체화이다. 우리가 양담배를 피우지 않는 이유처럼 직배영화를 보지 않는 다면 그만큼 한국영화는 우리의 문화적 자랑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쉰들러...'는 직배영화이다.


  이기원<열린빛 영화감상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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