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다니다 보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고개 숙여 낮은 곳을 들여다보며 야생화의 아름다움에 감동하는가 하면 때로는 거대한 암벽을 바라보며 경외와 의구를 느끼기도 한다. 거대한 바위덩이가 주는 위압감은 엄청난 것이어서 왜 선인들이 바위를 십장생에 포함시켰는가, 혹은 윤선도가 오우가에서 왜 돌을 친구로 노래했는가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야생초의 싱싱함이나 거대한 암벽보다 더 큰 감동을 주는 것은 따로 있다. 그것은 불모의 암반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생명이다. 거칠고 메마른 바위덩이에 떨어진 솔씨 하나가 싹을 틔우고 둥치를 키우는 모습은 가히 ‘생명의 신비’이다. 그 좁은 틈새를 비집고 뿌리를 뻗어 마침내 바위 전체를 움켜쥐고 버티는 소나무! 그건 차라리 강인한 생명력의 증언이다.
 계룡산 발치에서 중턱까지의 소나무들은 이번 봄에 많은 상처를 입었다. 3월 초 1백년만의 폭설로 인하여 가지가 찢기고, 줄기가 꺾이고, 심지어 어느 것은 뿌리째 뽑혀 나뒹굴고 있다. 소나무와 잣나무만이 겨울에도 잎이 무성하여 눈을 지고 있었고, 그러다 보니 막대한 피해를 입은 것이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가. 은선폭포 위로부터 관음봉에 이르기까지, 계룡산 자연성릉을 거쳐 삼불봉까지, 또 큰배재나 남매탑 위쪽의 소나무는 단 하 그루도 뽑히거나 꺾이지 않았다. 그렇다. 경이로운 생명이었다. 계룡산 6-7부 능선 위쪽 척박한 토양에서 모질게 자라던 소나무만이 위기를 이겨낸 것이었다.
 계룡산 능선을 오르내리면서 배우고 깨닫는다. 불리한 상황이 유리한 조건으로 바뀔 수 있다는 진리를, 모든 것에 취약하고, 언제나 위기이고, 어려움만이 지속되고, 오직 단점뿐인 것... 이런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고개 들어 산을 보자. 바위 위에 버틴 소나무는 성공한 생명의 연금술사 아니던가. 묵묵하게 산은 웅변한다. 내려가는 능선이 있으면 반드시 오르는 능선이 다가온다고.
 “불경기의 끝이 안 보인다”, “경기 회복의 조짐이 없다”, “어렵다”, “어렵다”...하는 요즈음이다. 많은 학생들이 취업난으로 시들고 있다. 하지만 언제나 위기가 기회이다. 위기에 굴복하지 말고 위기를 새롭게 바라볼 때 그 위기는 은혜가 충만한 호기가 될 수 있다.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인생은 달라진다. 옛날 카르타고에서 대장군 한니발의 초상화를 그린 화가는 모두 죽었다. 장군이 싫어하는 장군의 애꾸눈을 그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일하게 살아난 어느 화가는 눈이 성한 쪽의 옆모습을 그렸다. 그 화가는 생명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당연히 많은 상을 탔다. 이 유명한 이야기는 세상을 보는 관점에 관하여 많은 것을 시사한다.
지난 주말에도 4학년 학생들과 등산을 하며 암벽 위 소나무를 바라보았다. 소나무가 말했다.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라”고. “새로운 창으로 세계를 만나라”고. “위기가 기회”라고.   

박찬인(불문 · 교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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