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미래를 전망한다 : 사회 - 김종엽 교수

김종엽

  사회의 미래를 말하는 것은 위험하다. 미래를 말하는 것은 실은 예언이라기 보다는 기대인 셈이며, 기대는 과거에 대한 원한 감정과 현재의 소망으로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원한과 소망으로부터의 자유를 확보하는 방법은 사회과학은 알지 못한다. 그래서 미래학의 미래는 밝지 못하다.
  근대 사회과학은 예언의 유혹과 결별하는 동시에 미래를 말하기 위해서 확률이나 경향을 말한다. 확률이나 경향은 미래에 대해 말할 수 있게 해주는 동시에 아무 것도 확언하지 않는다. 사건의 확률은 사건의 발생국면에 돌입하면 아무 의미를 갖지 않는다. 확률은 무엇이 일어날지를 말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가장 확률이 낮은 것은 바로 그 가장 낮은 확률의 사건이 발생하는 것이기 보다는 그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다리가 무너질 개연성이나 비행기가 떨어질 개연성, 혹은 아이가 정신병에 걸릴 확률이나 광우병에 걸릴 확률은 아주 낮다. 하지만 그런 일은 종종 일어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률이나 경향은 현재의 행동을 결정하는 참조사항의 기능을 한다. 그것이 미래를 보증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현재를 결정하는 요소로 참여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미래를 현재로 당겨오기, 그것이 근대화된 사회이론이 미래를 말하는 방식이다. 아래서 나는 그런 경향을 에토스라는 이름으로 말할 것인데, 그 에토스의 위상을 이런 식으로 이해해주기 바란다.
  에토스라는 낯선 말을 잠시 설명하자. 에토스란 습속을 뜻하는 그리스말이다. 이 말은 통상 윤리라고 번역되는 에틱스(ethics)의 어원이기도 하다. 뭐라고 번역되든 에틱스는 사회적 관행과 관습에 연계된 올바름과 착함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것은 칸트적인 의미에서 내면적 도덕의 초월적 원리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널리 통용되는 습속 그것에 일치하는 사회성원들의 성향 또는 경향이다. 한 사회의 에토스를 논하는 것은 그 사회성원들이 달리 행동하지 않을 확률이 높은 행동 경향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이 에토스를 형성하는 요소들은 매우 다양하고 요소들의 결합방식 또한 복잡하다. 하지만 한 사회의 에토스가 먼 과거보다 가까운 과거의 집합적 체험에 의해 더 크게 영향을 받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근현대사의 경험을 추적하는 것이 현재의 에토스를 설명하는데 더 도움이 될 것이다.
  한국 근현대사를 통해서 가장 중요한 집합적 체험은 식민지, 전쟁 그리고 분단이라고 할 수 있다. 세 가지는 모두 압도적인 사회해체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의 유산은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났다. 하나는 사회적 연대의 거의 전적인 소멸이다. 특히 한국전쟁의 영향은 결정적이었다. 전쟁으로 인해 이웃공동체는 파괴되었고 정치투쟁과 전쟁은 종종 가족 내부로까지 침투하여 연대의 자원을 파괴하고 고갈시켜 나갔다. 이로 인해 연대는 좁은 혈연집단으로 최소화되었고, 그로 인해 사회적 주요 행위자는 탈도덕화된 가족집단이 되었다. 
  다른 하나는 평등주의였다. 식민지와 전쟁을 경유하는 사회 해체 과정은 사회적 위계의 파괴과정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식민지 경험을 통해 전통적 지배계급인 양반은 해체되었으며, 식민지 시대의 상층 계급은 친일집단으로서 정당성을 상실했고, 전쟁은 물질적 자원의 파괴와 이주를 야기함으로써 모든 사회 성원들을 뒤섞어 버렸다. 그런 의미에서 전쟁 이후 남한 사회 성원들은 모두 위계 없는 평등한 출발선에서, 다시 말해 제로베이스에서 출발했다. 물론 계층적 상황을 면밀히 살펴보면, 전쟁 후에도 사회성원들이 가진 물질적·상징적 자원에는 작은 차이가 존재했으며, 그것이 향후 확대된 차이를 낳는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사회심리적인 수준에서 사회적 위계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우리는 화전민이다”라는 이어령의 전후(戰後) 발언은 이런 파괴적 평준화를 잘 표현하는 말이었다.
  연대 자원의 해체와 파괴적 평준화로 인해 주어진 것은 연대 없는 평등주의였는데, 이런 평등주의는 매우 복잡한 역동성을 가진다. 연대 없는 평등주의 또한 모든 평등주의가 그렇듯이 불평등의 형성을 억제하고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한 토양이 되었다. 남한 사회가 민주화를 성취할 수 있었던 것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지만, 그것의 핵심 요인 가운데 하나는 평등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민주화가 제약된 수준에 머무른 것은 그 평등주의가 사회연대감을 결여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연대 없는 평등주의는 반공국가였던 남한 사회에서 지위경쟁적 평등주의로 나아갔다. 사회의 보수성과 국가의 억압성으로 인해 집합적 지위 개선을 위한 노력의 전형인 노동운동의 발전이 억제되었기 때문에 개인들은 개인과 가족의 지위 향상에 모든 노력을 경주했다. 이런 지위경쟁의 합법적인 통로로 자리 잡은 것이 교육이었다. 나날이 강화되기만 하고 있는 놀라운 수준의 교육경쟁의 뿌리에 있는 것은 바로 이 지위경쟁적 평등주의이다. 문제는 이런 지위경쟁적 평등주의가 자기패배적인 귀결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것의 출발은 평등주의이지만 도착 지점은 확대된 불평등이기 때문이다. 이런 불평등은 오직 성장을 통해서만 진정될 수 있었다. 성장은 타자와의 지위 경쟁에서 생기는 심리적 고통을 자신의 ‘과거 상태와의 경쟁’을 통해서 진정시킬 수 있게 해주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연대 없는 평등주의는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민주화를 통해서 분배가 개선되고 노동운동도 발전하는 한편 경제성장은 서서히 둔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변화는 연대있는 평등주의를 요청했고, 실제로 87년에서 96년에 이르는 기간은 그것에 부응하는 변화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새로운 탈전통적인 연대가 민주화의 성과와 더불어 발전하기도 전에 우리 사회는 외환위기를 맞이했고, 연대 없는 평등주의 에토스는 외환위기를 계기로 빠른 속도로 신자유주의와 공명해나갔다. 신자유주의가 우리 사회에서 커다란 저항 없이 그렇게 쉽게 수용될 수 있었던 것은 ‘연대 없음’이라는 특성이 내면적으로 신자유주의적인 개인주의와 쉽게 동조할 수 있는 속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연대 없는 평등주의의 재착근이라 할 만한 현상이 발생한 것인데, 문제는 이번에는 그것의 내재적 약점이 이전과 달리 높은 경제성장에 의해 보완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전의 해결방식을 소환하기 마련이며, 이런 뒷걸음질의 산물이 박정희 향수와 이명박 정부의 수립같은 현상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문제의 징후이지 해결책은 아니다.
  아무튼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은 점점 줄어만 가는 품위있는 일자리(decent work)를 향한 더 강력해진 지위경쟁적 평등주의이다. 현재의 미국발 경제위기 속에서도 사교육비 지출만은 감소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그것의 두드러진 징표이거니와, 이 개인화되고 강화된 지위경쟁이 전체 사회적 재생산체제를 무너뜨리는 수준으로까지 강화되고 있다. 줄어가는 좋은 일자리와 세계 최저의 출산률 및 교육경쟁 사이의 악순환은 그것의 본보기이다. 강화되는 경쟁에 대해 더 자녀수를 줄이고 그래서 더 소중해진 자녀에게 더 많은 교육비를 투자하는 방식으로 대응하지만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는 한 총투입 비용만 급상승할 뿐 더 나은 보상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제 급상승한 투입비용은 대부분의 가계의 재생산을 위협하는 수준이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대학생들은 대체로 부모의 경제적 기반이 탕진되지 않아서 서른이 되도록 휴학과 어학연수와 고시 공부를 오가는 경우와 부모의 경제적 기반이 취약해서 대학생활의 절반 이상을 아르바이트에 소모하고 대학졸업과 더불어 여러 학기 동안 받았던 학자금 융자를 떠안고 사회에 내던져지는 경우 사이에 위치한다. 
  대부분의 가계가 견딜 수 없는 부담에 처한 상황은 연대 없는 평등주의의 작동 불능의 지경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사회적 에토스인 한, 어떤 대안이 조직되지 않는 한, 대안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떤 집합적인 정서와 분위기의 변화가 없는 한, 쉽사리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 그것은 기존의 에토스의 변형인 한에서 대안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현재 우리 사회에는 두 가지 방향으로 변형이 논의되고 있다. 하나는 연대 없는 평등주의를 연대 없는 위계(hierarchy)의 수용으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연대 있는 평등주의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이다. 전자를 지향하는 사람들은 두 말할 나위 없이 현 체제의 승자집단이다. 그들은 문화적으로는 경쟁이 더 높은 생산성의 유일한 길이며 개인들 또한 자신을 기업처럼 운영하라고 말하며, 제도적으로는 고교 평준화를 해체하고, 대학입시를 자율화하고자 하며, 공공부문을 약화시키거나 해체하고자 한다. 후자를 지향하는 사람들은 공적 시민으로서 현 체제의 문제를 자각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평등을 주장할 뿐 평등을 지향하지는 않았던 문화를 평등을 지향하는 문화로 바꾸고자 하며, 제도적으로는 보편적 복지를 확장하고자 한다. 흥미로운 것은 현 체제의 패배자들이다. 이들은 내적 갈등이 격심할 지라도 연대 없는 평등주의의 에토스에서 잘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한편으로는 “내가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닌데”라고 되뇌며 사실상의 불평등을 심리적 평등주의로 덮어버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연대를 맺어나가기 보다는 개인적 적응으로 이끌린다.  

   두가지 변형을 지향하는 힘 가운데 어떤 것도 뚜렷한 우위를 보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떤 것이 지배적인 것으로 정착할지는 알기 어렵다. 이명박정부의 등장은 연대 없는 위계의 수립가능성을 예시한다. 하지만 지난해 촛불집회는 연대 있는 평등주의의 길 또한 열려있음을 시사한다. 아마도 캐스팅보트는 현 체제의 패배자들에게 있을 것이며, 그 중에서도 청년세대에 있을 것이다. 그들이 어떤 선택을 할까? 장기하의 <별일 없이 산다>에 엿보이는 청년세대의 아이러니적 태도는 어디를 향하게 될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두 가지는 분명하다. 하나는 연대없는 위계와 연대있는 평등주의 가운데 어디로 향하든 그것은 연대 없는 평등주의보다는 심리적으로는 더 편할 것이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전자가 선택된다면 지옥에 접근하는 사회일 것이고, 후자가 선택된다면 다른 나라가 부러워할 나라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 두 가지를 결합하면 이렇다. 우리 사회의 미래는 속 편한 지옥 아니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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