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족이길 거부한 비극의 시작

    <글 싣는 순서>
   1. 역사란
   2. 제주4ㆍ3항쟁
   3. 한국전쟁
   4. 60-70년대 정치상황
   5. 87년 '노동자대투쟁'

  대부분의 역사적 사실들은 시간이 점차 흐름에 따라 다소 감정적일 수밖에 없는 현장의 체험과 경험들 보다는 역사에 대한 재검증과 재해석이 계속 시도됨에 따라 당시보다는 많은 자료들과 함께 좀더 객관화 될 수 있다.
  1950년 그 누구도 우린 한민족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그 시기에 누가 먼저 민족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었는가에 대한 몇가지 설들과 그 설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을 알아보고자 한다. 여기에는 많은 설들이 제기됐지만 지금에 와선 다음에 소개하는 세가지 정도가 많이 알려진 것들이다.
  우선은, 우리가 어려서부터 배웠던 남침설이다. 이것은 한국(미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으로 1949년 11월12일 에치슨 선언에서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하 북한)이 대한민국(이하 남한)보다 주동 군사력이 월등히 우세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극동 방위선에서 한국을 제외시켜야겠다고 공식발표하였다. 그시기 38선상에서는 끊임없는 소규모전이 발생중이었다. 국제연합 제5차총회에서 발표한 국제연합 한국 위원단보고서에 따르면 "1950년 3월1일 침입사건에 80%가 북한 보안대에 의해 자행되었고, 1950년 6월24일부터 25일 고요한 여름밤 17연대의 병사들이 남한 여타지역으로 부터 차단되어 옹진반도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는데 새벽네시 정각에 대포와 박격포가 너무도 갑작스럽게 남한 경계선을 침범했으나 남한군이 능히 방어할 수 있다고 인정, 소규모 전쟁중의 하나로 50년 6월 전투를 중요히 다루지 않았다. 그러나 계속해서 북한의 군대가 내려오자 사태의 급박함을 알고 대책을 마련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음은 북한의 입장 북침설을 살펴보면 두가지 정도인데 북한 내무성의 당시 반응과 북한 언론의 보도이다. 첫째 내무성 자료에는 6월25일 새벽 남한이 38선 전역에 걸쳐 38선 이북지역으로 불의의 진공을 개시하여 해주방향 서쪽으로의 금천방향, 철원방향에서 이북지역으로 1km까지 침입하였다. 이에 북은 방어전의 전개와 양양방향에서 38선 이북지역으로 침입한 적들을 격퇴하였다. 둘째로 1950년 6월25일 이후 북한의 언론보도에서는 "6월23일 오후 10시 남한 병력이 옹진반도의 운파산지역 폭격과 24일 전투의 계속과 25일 남한의 17연대 맹호부대에 의해 옹진반도의 부락산이 공격당하고 있는데도 방어만 하였다. 하지만 맹호부대가 25일 오후 2시30분 옹진반도의 수동까지 진격했고, 그 사이 옹진반도에 남한 경찰서와 부대를 공격하기 위해 게릴라를 투입했다."라고 썼다.
  여기에서 북한의 입장을 비판해보면 첫째 전쟁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미국측에 전가시키고 있고, 한때 그러한 반응은 근거있는 논리로 받아지고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거의 희박해져가고 있는 상황이다.
  둘째로는 위에서 말한 23-25일까지 남한의 진격에 대해 책임전가를 했지만 증명해줄만한 아무런 근거도 개진되어 있지 않고, 또한 북한의 공격 결정과정 또한 믿기 어려울 정도로 축소되어있다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침유도설을 살펴보면 첫째, 북한의 공격준비에 대해서 달라스와 미국방성 고위관료들이 전쟁 몇주일전에 동아시아를 방문했을때 전쟁발발에 대한 좋은 경고의 기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일언반구의 경고도 없이 침묵하고 있었다.
  둘째 이승만 정권의 호전적인 발언과 5.30 총선거 패배로 인한 부담과 점차 깊어져 가는 국내적, 국제적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승만 정부 내부에서는 단기간의 전쟁을 치르는것, 즉 북한을 전면전에 유도하는 것이 최상의 선택이라고 생각한 관료들도 있었다. 그리고 남한은 북한을 자극하기 위한 공격도 실제 강행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이 북한의 남침이 임박했노라 선전했다면 북쪽에서 전면전을 개시하지 않았을까라는점과 이승만의 장기적 전망은 어두웠지만 파멸의 길은 아니었고, 오직 전쟁을 일으키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선택했을 근거가 없다. 또한 49년 부터 38선 부근 옹진, 개성부근에서 빈번한 소규모전은 언제든지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전쟁에 대한 남한 스스로의 힘을 믿을만한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이제껏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전쟁의 반발에 관한 남북한의 입장은 상호 이질적인 부분도 많고 5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논란의 여지가 많다. 그건 전쟁의 책임 문제를 다소, 아니면 전부를 회피하려는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1950년 6월에 일어난 소규모전이 그전에 있었던 다른 소규모전과 별반 차이가 없었고, 남북한의 자료들에는 그 당시 남북한 모두가 전쟁을 일으키키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과연, 누가 먼저 공격을 개시했는가"라는 문제보다 "전쟁을 촉발시켰던 상황이 무엇이고 전후 남한내에 나타나는 해방직후에서 전쟁전까지는 좌우공존적 경향에서 전쟁 후 극우 반공적 편향으로 바뀌는 이데올로기의 변화를 살펴보는 것이 더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올바른 관점으로 생각된다.

 양만석(수학ㆍ3휴학 역사연구회횃불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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