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학교 학생운동회의 시작을 어디로 볼것이냐의 문제는 학생운동이 무엇이냐의 규정에 따라 달라진다. 그중 일상적 고민을 조직속에 담아내기 시작한 때를 초기로 본다면 77년경이 될 것이다. 80년 '민주화의 봄'당시 잠깐 반짝였던 우리학교의 운동은 전두환정권 집권후 전국 대다수의 대학처럼 비공개 소모임의 형태로 자리잡는다. 언더로 불리던 이러한 소모임들은 대개 한 학번에 4-5명정도의 인자로 구성되었으며 훗날, 총학생회 재건자로 구성되었으며 훗날, 총학생회 재건자로 구성되었으며 훗날, 총학생회 재건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경찰과 기관원이 학내에 상주하여 눈을 치뜨고 다니던 83년까지의 상황은 '숨어야 함다'는 극한 상태에 처하게 하였다. 이시기 소모임들은 공개성확보의 고민속에서 통일문제연구회, 흥사단아카데미, 우리문화연구회등으로 진출하거나 계속적인 비공개속에서 질적 발전을 꾀하게 된다. 지금은 자유스럽게 다닐 수 있는 문과대 구름다리가 통제되어있던 당시 그곳을 뚫고 유인물을 배포했다든가 도서관에 기습적으로 유인물을 배포했다든가해서 그 즉시, 경찰에 연행되어 갔던 선배들의 일화는 당시가 얼만만큼 폭압적인 상황이었던가를 연상케 한다. 83년말 전두환정권은 비재의 안정화가 어느정도 완성되었다고 판단했는지 조금씩 유화조치를 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비공개 소모임들이 본격적인 공개활동에 들어선다. 84년 본격적인 유화국면에 이르고, 80년 제적생들이 복적하게되자, 드디어 학생운동의 모습들이 본격적으로 가시화되었다. 물론 이 와중에서도 우리 문화연구회등이 해산되고, 주동자들이 구속되는등 본질적인 변화가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85년, 6월에 이르러서야 16대 총학생회가 학생들의 손으로 재건된다. 조금전에 밝혔듯이 언더출신들이 대거 총학생회에 참여하였지만, 대의원은 이전의 학도호국 단원들이 장악하는 미완성된 모습이기도 했다. 대중조직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상황에서 86년에 이르면서 4ㆍ19기념 학술제 준비작업을 하는 경제학과 학생들이 강제연행되고, 신민당 현판식과 관련하여 학생들이 대거 구속되는 사태에 직면하게된 전체학생들은 광범위한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이로서 운동에 있어 총학생회를 중심으로한 대중결집구조가 명확히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최초의 수업거부투쟁이라는 결집력으로 이어진다. 이런 모습들은 87년 6월항쟁이라는 정점을 향한 상승기적 모습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87년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과 4ㆍ13호헌조치는 범국민적 반발을 사며 학내 분위기 역시 점차 극에 달하기 시작했다. 6월15일에는 3천여명의 학생들이 분산해 유성으로 진출하였고, 그 여세를 모아 대전역까지 나갔는데, 시민들의 민주화열망이 합세해 그 숫자가 5만여명에 이르렀다. 이같은 시위는 6월19일 택시기사가 전경을 치어 숨지게 하는 침체기를 맞기까지 계속되었다. 6월항쟁을 통해 입증된 대중적 지지기반은 최초의 전국집중모임인 전대협 1기 출범식을 우리학교에서 개최하는 이유가 되었다.
 88년에 접어들자. 전국적으로 통일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다. 학내에서는 이와 더불어 교련거부와 전방입소거부투쟁이 거세게 일어났고, 87년 충남지역 수해 복구에 참여한 후, 88년부터 본격적으로 농활준비가 진행되었다. 89년에는 전대협 3기 출범식을 우리학교에서 개최하면서 통일문제에 더 깊은 고민을 하게된 한 해였고, 이철규열사 타살의혹 진상규명을 위한 투쟁이 진행되었다.
 90년에 들어오면서 끊임없이 문제제기 되었던 민자당으로의 3당합당이 가시화되고 이에 격분한 전국적 시위속에 우리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수업거부를 통한 학생들의 불이익이 학생조직에 대한 불신을 가져온 해이기도 했다. 91년에는 명지대 강경대군이 과잉진압으로 사망하자 '국가보안법 철폐, 백골단 해체'를 요구하는 이른바 5월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또한 민자당 창당일을 기점으로 3천여명이 동맹휴학을 벌이기도 했다. 85년이후, 총학생회를 이끈 주도세력은 91년 선거에서 고배를 맛보았고, 그간의 투쟁방식이나 대중접촉 구도에 대한 반성을 하게 되었다.
 92년 말투버 진행된 '해양학과 문제'가 93년까지 학원내의 민주화와 교수공채 합리화를 내건 싸움으로 계혹되었으며, 94년 한해는 쌀숭비개방저지 투쟁으로 보낸 한 해였다. 물론 해마다 5월 광주문제에 대한 '진상규명 책임자처벌'의 요구와 8월 '평화정착, 자주적 통일'의 외침은 계속되어 왔다.
 지금까지 살펴본 우리학교운동사의 발달과 그 현상적 모습들은 본질을 규명하기에 너무도 부족한 나열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역사가 미래를 비출수 있기에 중요하듯, 치열했던 근간의 조각들을 조금이나마 정리하고 회상해보는거 그 자체가 현재의 자신을 규정하고 미래의 우리를 전망케하는 주춧돌이 될 수도 있음이다.

 김재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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