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속 충대人 Season2 - 서상수 동문(축산과 ㆍ59학번)

 지난해 여름 미국 서부지역을 방문해 동문들의 소식을 전했던 ‘세계속 충대人’. 올해는 10박 11일 일정으로 캐나다의 밴쿠버와 토론토를 방문해 그곳에 살고 있는 동문들을 만나고 돌아왔다. 완전히 새로운 환경 속에 적응하고 뿌리내리기까지,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은 그들의 삶. 지구 반대편에서 선배들이 전하는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자.

   


 토론토의 북적이는 한인식당에서 만난 서상수 동문. 일흔에 가까운 나이임에도 장난기 가득한 표정에는 자신감이 넘친다. 그가 전하는 이야기는 마치 한 편의 파란만장한 드라마 같다. 필자는 서 동문을 ‘행운의 사나이, 그리고 그 행운을 스스로 찾아내고 거머쥔 사람’이라 표현하고 싶다. 도대체 어떤 삶인지, 그 행운들은 어떻게 찾아냈는지 어디 한번 그의 인생을 엿보자.

 학교다닐 때 학비가 안들었다구요?
 대학교에 다닐 때는 교수님댁에서 가정교사를 하며 지내서 돈이 안 들었어. 날 잘 봐주셨는지 딱 찍어서 자기 집으로 오라고 하더라고. 영 불편해서 안 가려고 했더니, 다른 조건은 없고 그냥 중학교 2학년인가였던 자기 아들을 대전고등학교에 넣어달래. 책임 못 진다고 했더니, “학생 할 수 있다”는 거야. 다행히 결국 들어갔어. 못 들어갔으면 큰일났지.(웃음)
 내가 좀 복을 타고난 것 같아. 돈은 없었지만 학교에서 교수님도 잘 만났고, 그 당시만 해도 B학점 이상만 되면 학교에 돈을 안냈어. 그래서 학비도 안내고 다녔어.

 졸업 후에는 어떻게 하셨나요?
 대학원까지 졸업하고 나서 어떻게 할지 고민이 많았어. 그런데 해마다 덴마크 정부에서 해외에 있는 농업국의 농과대학 나온 학생들을 선발해 유학생으로 받는 사업이 있었어. 한국이 그 당시에는 농업국이었거든. 한국에 12명 TO가 나와서 12명에게 모든 비용을 지원할 테니까 애들을 보내달라는 거야. 이제 갓 농대 나온 애들 중에서 시험을 통해 선발했지. 그런데 내가 어떻게 복불복으로 거기에 됐어.

 보통 공부하신게 아닌 것 같은데..
 많이 했어.(웃음) 합격한 12명 중에 서울대가 10명이더라고. 지방대는 나 하나였나.
 공부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덴마크 시험 준비할 때, 학교에서 학장 추천서가 필요하다고 해서 학장님께 갔더니 “너 거기 시험 되면 학교에서 잔치를 해준다”고 하더라고. 갈 생각도 하지 말라고 그래. “추천서는 해줘, 그런데 안돼~”라면서 겁을 번쩍 주더라고.
 그래서 내가 다 팽개치고 한 8개월 팠나. 시골에 가서 방을 얻어서 고등고시 공부하듯이. 대전에 유천동이 옛날에는 냇가가 좋았고 농사짓는 사람들이 많았어. 거기 친구가 하나 있었거든. 내가 공부하러 절에 간다 했더니 자기 집에 오라 하더라고. 거기서 처음으로 공부 열심히 해봤어.

 오기도 생겼을 것 같은데요
 오기도 생겼지. 그래갖고 한 6개월 하다보니까, 여름에 땀이 많이 나서 엉덩이가 곪는 것도 몰랐어. 말하자면 집중력이지 그만큼. 나중에 보니까 아프더라고. 병원 가서 응급치료를 하고 나서 의사가 “학생 뭐하다 이렇게 됐냐”고 그래. 공부하다 그랬단 소리는 못 했지.
 시험 보니까 나중에 됐다고 통지가 왔어. 학교에 쫓아갔더니 학장님이 어떻게 공부했는지 강당에서 한번 강의하라면서 “수고했다”고 하더라고. 그때 그게 제일 추억이야. 공부 한 번 정말 열심히 해봤어.

 그럼 캐나다는 언제 가신 건가요.?
 덴마크에서 2년간 유학을 마친 후 직장을 독일에 가서 잡았지. 한 1년 일하고 나니 아무래도 독일보다는 캐나다가 나을 것 같아서 한번 와봤어. 그런데 좋더라고. 그래서  왔어.

 정착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고생 많이 했지. 우유가공을 전공했기 때문에 캐나다에서 그쪽 일을 찾았는데, 아무 직장이든지 경험이 없으면 안 넣어줘. 그런데 그 경험이 영어로 ‘Canadian Experience’야. 캐나다에 처음 온 사람이 무슨 캐나다 경험이 있겠어.
 한 1년을 직업을 못 구했어. 그래도 회사를 계속 찾아갔지. “캐나다 온지도 얼마 안 됐는데 캐나다에서의 경험을 물으면 어떻게 하냐”고. 그렇게 찾아다니는 동안 식당 그릇닦이부터 시작했어. 청소하는 일도 해봤고.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그런데 어느날 회사 관계자가 그런 나를 유심히 본 모양이야. “전화번호 하나 적어두고 가라” 하더라고. 다음날 전화가 와서 갔더니 “내일부터 와서 일 나오라”더군. 밤근무인데 할 수 있겠냐고 그래. 밤근무고 낮근무고 나는 OK. 그래서 열심히 했지.
 그런데 한 3개월 경험 쌓으니까 노조 가입 때문에 그런지 딱 자르더라. 그래도 공장장이 날 잘 봤는지 다른 우유회사에 넣어줘서 그곳에서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어. 거기서 10년 정도 근무했지.

 얼마만에 일자리를 잡은 거죠?
 한 2년 걸렸나. 끈기로 죽어라고 쫓아다닌 거지. 나 좀 살려달라고 하면서. 그때 좀 고생했어.
 근데 이게, 외국에서 공부한 경력을 인정해주지 않으니까 승진이 안돼. 억울하면 자리는 보장해 줄테니까 다시 공부를 하고 오래. 그때만 해도 애가 벌써 둘이지. 웬만하면 한번 해보겠다고 하겠는데, 공부하면 물린 사람이라 포기해버렸지. 못 견디고 10년 만에 내발로 나왔지.

 그 이후에는요?
 우리 집 앞에 편의점이 있었어. 애들 키우느라 우유도 사러가고 하다 보니 단골이 됐지. 주인이 유태인 할아버지인데 나이가 많아. 어느 날 나를 한 번 불러서 하는 말이 봉급이 얼마나 되냐는 거야. 왜 묻냐고 했더니 자기가 그 가게를 13년간 했는데, 이제는 자기가 나이가 많아서 자기 아이들에게 넘겨주고 싶어도 애들이 이런 일을 안하려한대. 나보고 “할 수 있으면 운영을 해보라”더라고.
 근데 난 가게의 가자도 모르는 사람이잖아. 그래서 아니라 했지. 그런데도 할 사람은 너밖에 없다는 거라. “너 이 가게 하면 백만장자는 안되지만 둘이 일하는 거보다는 백배 나으니까 와서 이어 받으라”더라고.
 ‘가게는 할 줄 몰라 했더니’ 다 알려준다고 걱정 말래. ‘돈이 없다’고 했더니 외상으로 해준다고 걱정하지 말래. 결국 그 가게를 받았지. 3년만 한다는 게 애들이 계속 자라고 하니까 놀 수 없잖아. 그래서 편의점 한 자리에서만 25년을 했어.
  
 자리가 대목이긴 했는지, 편의점을 이어받은 후 장사를 하면서 돈을 쇼핑백에 가득 담아 양손에 들고 퇴근을 하곤 했다는 서 동문의 이야기. 말 그대로 도깨비 방망이라도 얻는 옛날이야기 같았다.
 이제는 은퇴했지만 서 동문은 지금도 일주일에 세 번씩 UPS에 단순 서류 업무를 하러 출근한다. “놀면 병나는 체질”이라는 서 동문. 그는 재차 강조한다.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 단순한 말이지만 그가 하는 이 말에는 왠지 모를 신뢰감이 드는 것 같다.

 김대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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