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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습에 반기를 든 '신예 예술부대'◇전위미술을 알아본다
문화 | 승인 1995.09.18 00:00|(749호)

 전위미술의 정의
  미술에 있어서 전위(前衛)란 프랑스말의 아방가르드(Avant-Garde)의 가장 보편적인 용어해석으로 프랑스 군사용어인 전위(대부대의 전초로서 선발된 소수 정예부대)에서 나온 말이다. 예술상으로는 인습적인 권위와 전통에 대한 반항, 혁명적인 예술운동에 기치를 내걸고 행동하는 예술운동을 말한다. 따라서 특정 주의나 형식을 가리키는 용어라기 보다는 신시대의 급진적인 예술정신 전반에 걸쳐서 사용되는 말이지만, 특히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미술양식에 국한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유럽의 전위미술이란 지배적인 부르조아의 사회적, 미적가치에 대항하는 소수집단의 운동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며 앞으로 그 용어를 아방가르드로 통일하기로 한다.
 
 미술사적인 의의
  필자는 지금 이좁은 지면에 '전통과 아방가르드'에 대한 보다 효율적인 논의를 어쩌면 사람마다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를 두 단어의 미술사적인 정의는 피하기로 한다. 그리고 그 갈등의 역사를 차례로 열거한다는 것도 지면상 무리가 있을 것 같다. 다만 누가 뭐래도 분명한 한가지 사실, 즉 유럽과 미국의 현대미술사에서 나타난 큰 특징은 전통에 도전한 아방가르드의 점철이라는 사실로부터 필자의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모던아트의 탄생과 함께 출발하여 20세기 미술사를 현란하게 수놓은 아방가르드의 갱신은 인습적인 권위와 전통에 정면으로 대항하여 경화된 기존 가치질서에서 홀연히 자기 해방을 선언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미술의 지평을 무한대로 확대시켰다는 점에서 아마도 영원히 예술인의 추앙을 받게 될 것이다. 금세기 초 초현실주의와 다다이즘의 출현으로 확고한 자기기반을 획득한 아방가르드는 앞 시대, 19세기 선배화가들이 아카데미즘에 도전한 용기에 어느정도 신세를 지고있다. 인상주의 작가들이 사롱전의 낙선자 전시회를 연 것은 기존의 조형질서에 맹목적으로 순종할 수 없는 창조적 예술 정신의 다른 표현이며 미래파, 야수파, 입체파 모두가 당대의 모멸과 무관심을 견디어 낸 전통에의 도전이었다.
  아방가르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언제나 예술 또는 조형이라는 이름의 규범이 아니라 전통과 단절된 현재라고 하는 상황이었으며, 그 현재적 상황에 대처하는 '인간의 가장 자유로운 상태에서 창조적의지'야 말로 아방가르드 정신의 핵심이었다. 필자는 이러한 아방가르드의 대표적인 예로 마르셀 뒤샹의 업적을 들고 싶다. 뒤샹은 레디메이드오브제(ready-made- object)를 1913년부터 만들기 시작했는데 엄밀한 의미에서는 1912년에 이미 나타난 개념적 큐비즘이 준비해놓은 예술상황의 분위기 조성때문에 가능하였다고 볼 수 있다. 회화의 객관적 실재성(objective-reality)는 이들 큐비스트들의 가장 핵심적인 과제였으며, 1912년 5월 피카소는 그의 첫번째 꼴라쥬인 '등나무 의자가 있는 정물'이란 작품을 제작하였다. 이러한 배경에 힘입어 뒤샹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다름아닌 1917년도 작품 '샘'이다. 이 작품은 제목이 '샘'이지 사실은 변기를 상점에서 사다가 작품으로 전시한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뒤샹의 이 제스춰는 어떻게 이해되어져야 하는가? 뒤샹을 일종의 반예술이라는 개념하의 제스춰예술 또는 행위예술의 시조가 된다고 풀이하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이것도 역시 하나의 성실한 예술행위로서, 예술이라는 문화패러다임(paradigm)의 변천에 수반된 예술이라는 개념자체가 변한 것이라는 주장에 입각해서 새로이 변천된 예술개념의 정의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미학자도 있다. 몰론 그같은 행위들이 기존예술패러다임의 문화양식에 젖은 예술세계의 기존 예술세대를 향한 반항의 제수춰라고 밝히기는 했지만, 역시 뒤샹의 다다적 행위는 현대회화의 과정에서 문화예술의 전통붕괴가 일으키는 심각한 위기에 대한 하나의 가능한 대응방법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오늘날의 보편적인 지론이다. 이것은 뒤샹의 다다행위가 대변하는 아방가르드 운동인데, 그 저변에 흐르는 논리는 다음과 같이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기존의 패러다임이 제구실을 못하게 되었을때, 예술가들은 기존 전통양식의 이디엄(idioms)을 사용하여서는 더이상 창작 활동을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을 의식하게 된다. 그리하여 새로운 예술양식, 새로운 언어가 부재할 때, 그들이 생각해낼 수 있는 것은 의식적으로 비 기존양식의 작품을 창출해 내는 것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나의 검증
  앞서 언급한 자료를 토대로 필자는 좀더 구체적으로 우리의 화단에서 피부로 접촉하는 아방가르드(Avant-Garde)의 현실을 분석하고자 한다.
  서구에서 조차 금세기에 일어난 아방가르드의 역사적 궤적을 모든 사람들이 고운 눈으로 보아준 것만은 아니었다. 아방가르드의 정신이 창조적에너지의 충만속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부정하지는 않지만, 새로운 현재적 상황에 예술가가 꼭 그런식으로 또다른 부정, 또다른 야만적 에너지로만 반응하는 것이 최선이었냐고 준엄한 비판과 경고를 내리는 지성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뒤샹의 변기를 예술작품으로 제시하는 제스춰의 의미는 낡은 관습에 대한 혐오이며, 그것에 대한 상징적인 파괴로서 나타난다. 바로 이런 뒤샹의 근본적인 미를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마치 뒤샹이 새로운 예술의 관심을 제시했다고 판단하여 계속 새로운 기성품(ready-made)을 전시하는 원숭이와 비슷한 제스춰를 행하며, 마치 자기가 대단한 전위예술가인양 의기양양해하는 우스꽝스러움을 범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많은 수의 '전위예술가'를 자칭하는 우리화단의 작가들이 이러한 어리석음을 범했고 또 아직도 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인식되어야 할 점은 뒤샹의 제스춰나 역시 낡은 관습에 의거한 예술행위를 야유하는 해프닝이나 퍼포먼스식의 소위 아방가르드적 예술행위들은 순전히 낡은 관습에 대한 반대의 제스춰라는 점 하나때문에 의미가 부여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서구의 아방가르드는 하나의 형식이 아니라 정신이며, 예술규범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현재적 상황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인데, 그런 현대적 상황이 다른 우리의 현실에 그대로 대입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 상황과 본질을 제껴두고 형식만 흉내내는 것은 작가자신에게는 스스로 허망한 것이며 되며, 그런 흉내내기는 곧 문화적 식민지를 자초하는 것은 자명한일이다.
  어쨌든 20세기초반 뒤샹이 가담했던 다다운동이 좁은 의미에서 '아방가르드'의 시초라고 한다면, 이미 앞에서 뒤샹의 기성품을 설명하며 언급하였듯이, 이 운동의 근간을 이루는 예술철학은 기존 전통의 반대와 거부에 있다. '반예술'의 이론 같은 것은 역시 예술의 전통적 관습에 대한 부정으로서, '예술'이란 개념도 주어진 전통적 관습속에서 의미가 주어지는 것이므로, 이것이 무슨 새로운 예술론을 제시하기 때문에 그것이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운동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서구의 전통적인 예술관습의 위기 속에서, 가장먼저 강력한 제스춰들을 통해 기존의 관습을 비난, 배격, 거부한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것과 유사한 양상이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경우에는 이미 의미가 상실된 것이다.
  왜냐하면 동일한 기존의 관습에 대한 배척의 주장(아방가르드)은 이미 이루어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임 립(회화ㆍ교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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