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비론 허무주의 극복이 대안

 시사만화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을 하나 꼽으라면, 간단한 표현법으로 내용 전달이 아주 쉽게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이것은 시사만화의 내용을 식지들은 물론 일반대중에게까지 거의 같은 강도로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 강력한 침투력 때문에 시사만화는 일반대중에게 현실정치와 각종 사회모순을 비판하고 풍자하는 방법 중 가장 강력한 방법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기에 프랑스혁명 당시 한 귀족이 "장문의 글로 농노들에게 말하는 것은 두렵지 않아. 하지만 저놈의 만화, 만화만은 안되지. 그것은 저 무식한 놈들에게까지 그대로 모든 사실을 알려주거든." 했을까.
 동서고금 모든 독재자는 일반대중이 가장 쉽게 접근하며 즐기는 매체에 대해 철저히 통제한다. 이런 맥락에서 시사만화는 항시 첫번째 통제 대상이었다. 암울했던 유신과 5공시절 대부분의 시시만화 내용을 보면 일상생활의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있다. 직접 이런 어려움을 유발시킨 정권을 향해 목소리를 높일 수 없기에 민생고로 문제의식을 우회한 것이다. '고바우 영감'은 이예로 딱 맞는 만화다. 이런 정권의 통제가 약간 누그러진 88년 창간한 한겨레 신문의 '한겨레 그림판'은 다른 기성신문에 소재와 표현의 다양함을 주었다. 박재동 화백이 들이대는 날카로운 풍자의 칼날은 분명 이전 시사만화와 다른 새로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요즘 풍자를 빙자한 허무주의, 양비론을 유포하는 시사만화가 보인다. 교묘하게 보수 진영의 논리를 담은 그림들은 이런 새로운 시사만화의 시작에 대한 반동(reaction)일까?
 나는 대학신문 만화에 조차 가끔씩 보이는 양비론과 허무주의는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대학신문이 기성언론과 다르게 누린 특수한 지위-재원이 광고가 아닌 기성회비 라는점, 그리고 대학이라는 특수한 장소라는 이점- 때문에 누려왔던 약간의 특권(?)이 이제는 거의 사라진 느낌이다.이렇게 말할 수 있은 이유는 시사만화의 내용 차별이 거의 기성언론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때문에 대학신문에 시사만화를 그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바라는 것은-모든 시사 만화가가 추구하는 것일 테지만, 대안을 제시하는 내용을 그려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는 독자에게 속시원함을 주고, 현실을 직시하게 해준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다. 어떤 운동량을 유발시켰을 뿐이다. 이 운동량의 방향을 시사만화가 제시할 수 있을 때 가장 좋은 만화라고 생각한다. 대학은 학문이라는 토대가 있다. 이를 이용하여 풍자만 아닌 대안까지 제시해야 하지 않을까?

 

박빈희(충대신문 40기ㆍ컷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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