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피고’

  너무나 잊고 싶은 아픈 과거인 그 날의 악몽 속에서 헤메이는 한 소녀, 그 소녀를 찾아 떠나는 ‘우리들’-머리만 큰 지식인들로 느껴진다-은 감상주의에 빠져버리고, 소녀가 남기고 간 자취와 흔적으로 광주의 상처에 전염되어 가는 주위의 사람들. 이것이 이 영화를 끌고가는 큰 밧줄이다.
  이 영화는 그 날의 상처로 실성한 소녀가 인간 본연의 폭력성에 충실한 공사장 인부 ‘장’과 동거하는 모습, 그리고 그를 만나기 이전까지의 소녀의 흔적을 쫓아가는 ‘우리들’의 발자취, 이 두가지 테마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면서 마음속에서 지울 수 없는 응어리를 간직한 소녀의 그 날의 기억들이 영화의 중간중간에서 조금씩 배어나와 관객들로 하여금 긴장감과 호기심을 늦추지 않게 하는 영화적 장치를 이용하고 있다.
  오월의 광주를 도망쳐 나온 소녀의 정상적이지 못한 삶, 그것은 경운기를 타고 가던 사람, 술집 주인, 그리고 어린 여자애를 좋아했으나 사랑을 이루지 못한 김씨등에 의해 연명되어 지지만 소녀는 그들에게 갖가지 상처만 전염시키고 잠시나마 머물렀던 그들을 등지며 매번 떠나게 된다. 그리고 친구의 동생인 소녀를 가슴 벅찬 이상적인 인물인양 여기는 ‘우리들’은 소극적인 행동과 슬픔의 반전인 코믹한 모습으로 소녀를 찾아 헤메인다. 그런 그들이 우리들에게 답답하고 짜증나게 여겨지는 것은 현재 이 시대를 살아가는 바로 ‘나’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일 것이다.
  ‘꽃잎이 피고 질때면 그 날이 또 다시 생각나 못 견디겠네. 서로가 말도 하지 않고 나는 토라져서 그대로 와 버렸네.
  소녀는 공사장 인부 ‘장’을 무작정 따라간다. 그 필연성은 나중에야 밝혀진다. 소녀의 죽은 오빠와 ‘장’은 너무도 흡사하게 닮았기 때문이다.
  ‘장’ 두 사람 모두 망가질대로 허물어진 모습이기에 소녀를 쉽게 받아 들일 듯 하지만 오히려 그런 이유로 강하게 거부한다. 감정 표현방식이 어눌한 그는 소녀를 매섭게 학대하고 힘 있는 자의 권력(?)으로 강간까지 서슴치 않는다. 그러나 ‘장’또한 예외일 수는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소녀의 상처와 아픔에 점차 전염되어 어쩌면 소녀를 가장 많이 이해해서 감싸 안으려는 사람으로 변해간다.
  무덤가를 헤메는 소녀, 이를 지켜보는 ‘장’. 그러다 신들린듯 마침내 억눌렸던 그 날의 기억을 웅얼대듯 토해내는 소녀의 음성은 우리의 궁금증을 해소시키기 위한 청량제였지만 막상 거부하고 싶은 피맺힌 응어리였다.
  민주화의 봄 시작을 알리는 그날!
  ‘전두환을 찢어 죽이자’, ‘살인마 전두환’ 등의 플랭카드를 들고 금남로 거리로 뛰쳐나간 시민들과 학생들은 육중한 탱크와 총탄앞에 쓰러지고, 도망가고, 죽어가고, 어디론가 실려가고…. 그 속에는 소녀와 소녀의 어머니가 있다. 넘어진 소녀를 위해 뒤돌아 뛰다 총을 맞고 쓰러지는 어머니, 소녀의 손을 놓지 않으며 죽어가는 어머니, 그런 상황 속에서 소녀는 공포감에 질려 어머니의 손을 발로 짖이겨 빼내고 도망간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일그러진 시체더미 트럭에 실려가는 소녀는 매장시키려는 시체들 속에서 가까스로 목숨만을 지켜낸 것이었다.
  이것이 그 날의 일들이었고 철부지 어린 소녀가 당해야 했던, 그래서 그토록 떨쳐버리고 싶어하던 기억들이었다.
  관객들은 이제야 모든 것을 이해하며 분노섞인 한숨을 크게 내뱉는다. 그리고, 광주의 아픔을 대변하고자 하는 소녀를 자신들의 보편적 상처로 감싸안으며 극중 다른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소녀의 상처에 전염된 채 자리를 뜬다. 이것이 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중요한 메세지이며, 잘 전달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오월의 그 날을 이야기 해왔던 그 어떤 것들보다도 우월하다는 생각에 젖어가고 있을 때, 유치한 듯한 ‘우리들’ 중 한명의 독백으로 영화는 막이 내린다.
  ‘혹시 찢어지고 때묻은 치마폭 사이로 맨살이 행여 당신이 눈에 띄어도 아무 것도 보지 못한 듯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 주십시오. 당신의 옷자락이나 팔꿈치를 잡아당겨도 부드럽게 떼어 놓아 주십시오. 어느날 그녀가 쫓아오거든 그녀를 무서워 하지도 말고, 위협하는 말도 던지지 마십시오. 그저 관심있게 보아 주기만 하면 됩니다.’

육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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