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에서 소문난 효녀(?)

  대학에 들어와서 석달 후 쯤이었다. 가까운 논산이 집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달에 두세번 집에 내려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집에 갔다 올라오면서 어머니와 심하게 다투었다. 우리학교에서 출발하여 논산 우리집까지 약 2시간정도 걸린다. 다른 친구들에 비해서 짧은 시간이었지만 차만 타면 피곤한 나는 집에 들어갈 때마다 파김치가 되어버린다. 사실 나는 집에 가기 전에는 집에 가는 차속에서 혹은 집에서 자면 된다는 생각으로 전날에는 으레 늦게 잠을 자곤 한다. 때문에 집에 들어가면 식구들에게 얼굴만 비추고 곧장 내방에 들어가서는 잠에 빠졌다. 저녁도 그 다음날 아침도 먹지 않았다. 객지(?)에 있다가 온 딸에게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은 어머니는 밥도 먹지 않고서 잠만 자는 나에게 화가나신 것이다. 일방적이었지만 그때 어머니에게 심하게 꾸중을 들어야만 했다.
  “어머니, 아버지 얼굴도 안 보고 잠만자다가 갈 것이면 집에 오지마!!” 무척이나 화나신 모습이었다. 저녁에 대전으로 다시 오면서 마음이 무척 불안하였다. 전화를 해도 어머니는 무뚝뚝하였다. 일주일을 시작하는 월요일부터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다. 어떻게 풀어야 할지 막막했다. 아침부터 있는 수업도 잊어 버린채 나는 엄마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예쁜 편지지에 어머니에게 죄송하다는 내용과 앞으로 잘하겠다는 착한 딸이 되겠다는 반성문이었다. 그저 죄송한 마음만 들뿐이었다. 편지를 읽으시면서 어머니는 많은 눈물을 흘리셨다고 하셨다. 그 다음 집에 갈때는 피곤해도 누워있지 않았다. 청소도 하고, 설겆이도 하고 아마 빨래까지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나의 다짐은 짧은 순간이었다. 한달정도 지나면서 다시 해이해지기 시작했다. 2년이 지난 요즘은 어머니도 아예 포기상태인 것 같다. 피곤한 것을 이해해 주시는 것인지, 밥먹고 자라고 하시던 어머니도 이젠 깨우지 않으신다. 나에겐 편하고 깊이 잘수 있어서 좋지만 아마도 어머니는 걱정일거라는 생각이 든다. 집에서도 잠자느라 밥도 안먹는데 대전에 가서는 오죽 하겠냐고 걱정하시는 어머니는 가끔은 편지 얘기를 하신다. 언제쯤 그 편지의 내용처럼 되는 것이냐고….
  또 얼마전 3월 24일에는 큰어머니 환갑잔치가 있던 날이었다. 큰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돌아가셨다. 큰 집 식구들이며 친지분들이 모두 모였다. 나도 대전에서 아침 일찍 논산으로 향했다. 당일에 갔다가 올라오는 조금은 피곤한 날이었다. 사람들도 많았고 음식도 많아서 환갑잔치는 푸짐해 보였다. 삼단케잌과 화려한 꽃꽃이가 놓은 테이블에 큰 어머니는 한복차림으로 혼자서 앉아 계셨다. 큰어머니는 환갑잔치의 주인공임에도 늙어 보이지 않았다. 식순에 의해서 사회자는 아들 딸을 앞으로 불렀다. 남매를 두셨기에 아들과 며느리, 딸과 사위 그리고 손자 손녀들 모두 앞으로 나와서 한줄로 섰다. 더 오래 오래 사시라고 절을 하기 위해서. 그러나 큰 어머니는 절 받기를 거부 하셨다. 큰아버지 없이 홀로 절을 받으시려니 마음이 아프셨나보다. 나도 모르게 코가 찡하면서 눈물이 나려했다. 사촌언니는 벌써 조용히 눈물을 닦고 있었다. 그때 문득 나의 눈에는 저 멀리 계시는 우리 아버지가 보였다. 작은 체구에 주름많은 검은 얼굴이지만 내 눈에 들어왔다. 고생하신 그 모습, 농부로써 50년을 넘게 살아온 그 모습 이지만 그러나 나는 좋았다. 함께 살아계시다는 그 이유만으로 그렇게 감사할수가 없었다.
  늘 하시는 말씀이 다른 집 얘들처럼 풍족하게 해 주는게 없다고 하시지만 우리 4형제를 위해서 밤낮으로 일하시는 아버지 어머니가 너무나도 고마웠다. 만약 아버지 어머니 중 한분이라도 안계신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런 생각은 사촌언니가 결혼을 할때도 느꼈다. 마땅히 친 아버지와 함께 주례앞으로 나가야 하는 신부는 다른 분과 함께 앞으로 걸어갔다. 그때도 언니는 울었다.
  사실 중학교 1학년 때에도 어머니없이 아버지와 동생 둘이랑 살면서 학교를 다니던 친구가 있었다. 아버지 밥을 자기가 직접 해 드리면서 동생들을 키웠다. 도시락을 싸오는 날이면 일주일에 한두번 나머지는 점심때마다 매점으로 가서 컵라면이나 빵을 먹던 친구가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는 너무 어린탓일까 그 친구가 불쌍해 보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가끔 그 친구에게 점심이나 줄 뿐이었다. 그 때는 왜 몰랐을까 어머니와 아버지의 소중함을 그 때 쯤 알았다면 아마도 동네에서 소문난 효녀가 되지 않았을까.

김은순(컴퓨터공교ㆍ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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