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는 외아들, 하나는 맏아들, 또 하나는 막내아들, 나만 홀로 그저 그렇게 둘째아들이었다. 그러나 나 역시 대학을 졸업하면 곧바로 당숙의 양아들로 들어갈 팔자였던 터. 그런 내 집안 내력을 들을만큼 주워들은 녀석들은 그래서 날 아예 양아들로 셈하곤 했다.
  그래놓고 우리가 우리를 슬쩍슬쩍 바라보니 우리는 결국 별스런 아들들의 모임으로 똘똘 뭉친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우리는 그게 좋았다. 별스런 아들들이 옷깃을 스치며 만난 사실이 신기했다.
  하늘은 높고 푸르고 나뭇잎은 싱싱했고 우리는 스물 한 살이었다. 우리는 마냥 우쭐거렸고 우리는 마냥 몰려다녔다. 사흘이 멀다 하고 다른 과 녀석들과 날달걀 내기 농구 시합을 했다. 그럴 때면 하나가 더 있어야 했기 때문에 셋째아들이든 다섯째 아들이든 별스런 아들이 아닌 어떤 녀석을 끼워 넣어야 했다. 그러나 그 녀석은 잠시 잠깐의 덤에 지나지 않았다.
  시합이 끝나고, 진 쪽이 날달걀 열개를 사서 하나씩 돌린 뒤에 모두들 깨뜨려 쪽쪽 빨고 헤어질 무렵이면 우리 별스런 아들들은 덤을 빼고 다시 알짜만 모이곤 했다.
  가자, 외아들이 눈짓하면 우리는 너나없이 그곳으로 향했다.
  복사꽃이 마주 바라보이는 그 집, 한 잔 두 잔 기울이다 복숭아꽃 뺨으로 볼그레 달아오르면 막내아들은 막내의 수줍음조차 내동댕이 쳤다.
  “저어기 보이는 저 복사꽃 말여, 저게 시방 내 눈엔 연분홍 치마 같아야.”
  “그래서?”
  맏아들이 받으면 그제야 막내는 막내티를 내며 수줍음을 탔다.
  “아니, 그냥 넘어뜨리고 싶어서…”
  엿새나 여드레 쯤에 한 번씩 우리는 꼬박꼬박 그 집 ‘복사골 식당’엘 갔다.
  “아이구, 학상들 어이 와. 복사꽃 필때 가더니만 질 만하니까 오네그랴.”
  “여드레 밖에 안됐구먼유.”
  “워매나, 그려? 내가 학상들을 보구 싶었던개벼.”
  “어서 한 됫박 줘유.”
  “배가 엄청들 고픈개벼”
  “외아들 양아들 막내아들 아까부터 눈앞이 노래유.”
  “맏아들은 어떻댜?”
  “맏아들 눈앞은 벌겋구먼유. 저놈의 복사꽃 땜에…”
  “국수 말아논 게 쪼금 남었는디 그거라두 말어줄까?”
  “술부터 어서유.”
  설흔 서넛 먹었을까? 맘씨 좋고 아직도 곱고 엉덩이 큰 복사골 아낙은 느려터진 말씨보다는 손이 쟀다.
  묻어놓은 독아지 뚜껑을 열고는 바가지를 휘휘 둘러저어 찌그러진 주전자에 막거리를 고봉으로 눌러 담을 듯 재운다.
  “오징어 두루치기두 내야지?”
  “안 하던 말을 오늘은 언간히 하시네유. 우리덜 주머니속이야 뻔히 넉 되에 두 접시쥬.”
  “오늘은 길순이 턱 쓸 테니께 맘 놓구 먹어들.”
  “길순이턱유?”
  “그랴, 접때 우리 길순이, 산수두 갈쳐주구 숙제도 봐주구 했쟎여.”
  “그럼, 오늘은 몽땅 거전감유?”
  외아들 막내아들이 좋아라 하자 맏아들이 넙죽 한 마디 거들었다.
  “야, 이 철딱서니 없는 아들들아. 길순이 엄니는 딸이 셋에다 아들이 둘여. 다섯 남매 키울려면 등골이 다 휜단 말여.”
  맏아들 다웠다. 그래서, 나 양아들도 덧붙여 거들었다.
  “늘 먹던 만큼은 낼 께유. 더 주시는 건 길순이턱으루 알구 먹구유. 그나저나 길순인 어디 갔대유?”
  딱이나 길순이 얘길 꺼내잔 건 아니다. 얼른 얘기끝을 내자는 뜻이었다. 그러잖으면 괜스레 길순이 엄닌 부득부득 우길거다. 오늘 것은 거저다 공짜다 하고.
  우리도 걸핏하면, 물에 빠져도 주머니부터 뜨기 일쑤 그러니 가난뱅이 사정은 비렁뱅이가 아는 것 아니냐.
  한 됫박, 두 됫박, 버얼건 오징어 두루치기에 아들들은 달아올랐다.
  “외아들아 내 잔 받거라.”
  “오, 막내아들아. 넌 취해도 안 취한 것 같구나.”
  주거니 받거니 우리들은 먹었다. 마셨다 기울었다 권커니 잡거니 했다.
  “자, 빈 잔에 그대를 가득 채워서 흘러가는 나를 취하게 하라!”
  나는 막내아들에게 사발을 건냈다.
  복사꽃은 연분홍 치마처럼 바람에 날리고 우리들의 봄날은 깊어만 갔다.
  세 됫박, 네 됫박…… 두루치기 두 접시, 한 됫박에 십오원 그래서 육십원. 한 접시에 이십원 그래서 사십원. 그래서 그렇게 모두 백 원.
  한 앞에 한 됫박씩 한 앞에 반 접시씩. 우리는 거나하게 취했고 아들들은 노오란 주전자처럼 찌그러져 간다.
  “오늘은 내가 낸다”
  외아들이 손을 휘휘 저었다.
  “내가 좀 보탤께”
  맏아들은 첨성대가 그려진 십원권 두장을 꺼내 들었다. “야, 나도 쫌 있어.” 그러면서 막내아들이 해금강 총석정이 그려진 오십원권을 뒤져 냈다.
  나에겐 한국은행 취장이 그려진 오원권은 커녕 일원권 조차 없었다. 버얼건 술기운과 1965년의 저녁노을만이 내가 가진 것의 다였다. 그러면서 뭣하려고 아까는 ‘늘 먹던 만큼은 낼께유’했단 말인가.
  외아들은 성깔을 낼락말락했다.
  “머잖아 더치페이 추렴의 시대가 온다. 우리는 우리식대로 우정을 치른다”
  외아들은 독립문이 그려진 백원권을 길순이 엄니 손바닥에 단호히 쥐어주었다.
  “언제나처럼 넉 되에 두 접시, 우리들의 백원… 됐지유?”
  “이걸 어쩐댜? 괜히 넉살좋게 거저타령만 했네 그랴.”
  나는 입술을 꼬옥 깨물며 나 자신에게 다짐했다. 아들들아, 미안하다. 늘 가난뱅이라 걸핏하면 얻어 취하는구나. 다음엔 맹세코 내가 사마.
  “여드레 뒤 이 시간에 무조건 여기서 만나자. 그날은 내가 사마.”
  나는 갑자기 불쑥 소리를 질렀다.
  맏아들이 근심스런 눈빛으로 나를 남몰래 바라보았다. 슬그머니 그 눈길을 피하며 나는 떨어지는 복숭아 꽃잎처럼 입술을 나풀거렸다.
  “무슨 맘을 잡수셨는지. 울 아버지가 접때 용돈을 주시지 뭐냐. 놀라지 마라, 한 장도 아니고 두 장이었다고. 백원짜리 두장!”
  믿지 못하겠다는 듯 아들들이 보내는 의혹의 눈초리와 헤어지고 나서 나는 마침내 햄릿처럼 고뇌하고 마의태자처럼 슬퍼했다.
  그렇다. 방법은 오직 그것 뿐.
  지금껏 살아온 내 생애의 어디쯤에 용돈이란 게 있었던가.
  그런데 너는 왜, 그래서 너는 어떻게 하려고?
  나는 마침내 술 취한 아버지의 주머니를 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신이여, 어느 날 술 취한 아버지의 주머니 속에 백원권이 너댓장 있게 해주소서!”
  도온… 좀, 주세유.
  아버지 앞에선 그런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도온”소리를 내뱉는 혓바닥은 언제나 보리밥처럼 까칠까칠 껄끄럽다. 저엉 죽기살기로 돈이 필요해도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아버지 앞에선 그저 똥싸듯 뭉기적거리며 바지랑대처럼 서 있는게 고작이였다. 끈적끈적 버티고 있노라면 이윽고 아버지의 눈길이 열린다. 부릅뜬 눈, 아니면 찢어지는 눈, 그게 아니라도 결국 곱지는 않은 눈이다.
  “뭐여?” 아버지는 눈이 으르렁거리고 다그치고 시퍼렇게 다가온다. 나는 흠칠 놀라며 모기 숨 넘어가는 소리를 비비꼬아 낸다.
  “도…오…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뭉툭하고 투박하고 뼛성서린 대답이 불거져 나온다.
  “돈이 워딨어”
  어따 쓸라구? 나긋나긋 뭐 그렇게라도 물어줘야 돈 까닭을 차근차근 털어놓을 게 아닌감. 제엔장, 후딱 커서 아부지 되는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내가 그럴라치면 그때마다 누나도 형도 꼭꼭 내 옆에서 나처럼 우두커니 서있다. 그러니까 한결같이 돈 타낼 꿍꿍이 속인가 보다. 그러나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장승 한쌍처럼 멀건히 있다간 금세 코가 빠진다. 나 하나도 꿰엑 소릴 쳐서 쫒아낼 판인데 둘이나 또 손을 내미니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
  “돈이 워딨어!”
  또 한번 그 빼액! 그러고는 그 뿐이다.
  「공책하고 분도기 사야 하는디….」
  「크레용두 사구 도화지두 가져가야 해유.」
  그러면서 우리들 오뉘는 서로서로 끼리끼리 눈을 흘기고 서로의 속내를 헐뜯는다.
  나 혼자만 달랬으면 아부지가 줄지도 몰랐는데 쟤가 끼어드는 바람에 망쳤어. 너 때문이야, 그건 너. 너 분도기 있잖아. 맞아, 내가 돈 타내려면 언제나 쟤가 훼방이야.
  너는 크레용 없니? 있으면서 뭘 또 산다구 그래.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음모를 간파하고 입에 거품을 물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멀쩡하고 상처는 늘 우리들 차지다.
  그렇게 그렇게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들어왔는데도 「용돈」은 변함없이 변함없이 낯선 낱말이기만 했다.
  아버지의 주머니 습격은 보기좋게 실패 했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 들어온 그날 밤 형도 모르게 누나도 모르게 엄니조차도 모르게 살쾡이처럼 틈을 엿본 끝에 아버지의 주머니에 내 검은 손을 넣은 것까지는 성공이었지만… 돈은… 달랑… 백원짜리 한 장 만이 다였다.
  나는 차마 꺼낼 수 없었다.
  아버지의 몽롱한 취기로도 또렷이 기억할 수 밖에 없는 달랑 백원…. 그 점이 아무래도 꺼림칙했다. 삼백 이십원쯤 있었더라면 두근거리는 간을 꾹꾹 눌러대면서 나는 백원짜리 한 장을 꺼냈을 것이다. 취기 탓으로 돌리며 고개를 연신 갸우뚱거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려보면서 아니 기대하면서.
  그러나 달랑 백 원. 이건 아무래도 아버지의 머릿속에, 너무도 선명히 각인되어 있을 고독한 액수였다.
  그 뒤에도 두 번이나 더 기회를 엿보았지만 한번은 텅텅 빈 주머니였고 한 번은 겨우 오십 몇원밖에 없었다.
  결국, 내가 술을 사기로 헌 날 아침이 밝았다. 그날따라 동쪽에서 버얼겋게 떠오르는 태양은 유난히도 찬란하고 이글거렸다.
  외아들 막내아들 맏아들과 마주칠 것을 걱정한 나머지 나는 강의까지 빼먹고는 얼렁뚱땅 점심 때우고 느즈막히 곧장 복사골 식당으로 갔다.
  「아이구, 학상 워짠 일루 혼자여?」
  「이따가… 모두들 다시 올거에유.」
  「으응 이따가, 근데 왜 벌써 혼자?」
  「사실은…」
  난생 처음 해보는 짓이라 말이 나오질 않았다. 목구멍에서 맴돌기만 하는 내말.
  「뭔디 그렇게 말을 못한댜? 길순이한테 장가라도 들텨?」
  얼레, 아줌니가 농담을 다 하네. 나는 그 바람에 말을 쥐어 짰다.
  「오늘은 지가 술을 사야 해유.」
  「그래서?」
  나는 뒷통수를 긁적거렸다.
  「학생 머릿니 있나벼!… 아이구, 알아들었구먼, 그런디 오늘 돈이 없다 그거지?」
  내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포옥 쉬자 복사골 아낙은 내 등을 두드리며 용기까지 불어넣어 주었다.
  「학생들이 무신 돈이 있댜. 담에 생기면 가져와.」
  그러더니 뭔 생각을 했는지 뜬금없이 한마디를 툭 던졌다.
  「이담에 크게되면 우리 길순이두 잘 봐줘!」
  나는 그 속내를 알 수 없어서 복사골 아낙의 푸짐한 엉덩이만 맥없이 바라보았다.  
  일이 술술 플리자마자 나는 부리나케 학교로 가서 외아들 막내아들 맏아들을 만났다.
  「어이 양아들, 너 어디있다가 이제 나타나냐?」
  북새통을 떠는 녀석들에게 나는 말없이 득의의 웃음만을 지어보였다. 아들들아 가자. 오늘은 내가 한 잔 산다.
  강의가 끝나자 나는 서둘러 아들들을 몰고 복사골로 갔다.
  넉 되에 두 접시.
  얼큰히 술기가 오르자 우리는 노래를 불렀다.
  「인생은 흐르네, 강물과 같이. 우리의 청춘도 흘러가리. 모여라 젊은 아들들아. 주막으로 모여라.」
  술에 취하면 으례껏 부르는 그것은 우리들의 백 원짜리 노래였다.
  취기의 끝에 셈을 하려고 맏아들 막내아들이 우물쭈물 거리자 복사골 아낙이 서둘러 호들갑을 떨었다.
  “끝났어 끝났어. 양아들이 아까 냈단 말여!”
  게슴치레 휘둥그레 눈을 뜬 채 아들들은 나를 바라보았다. 너도 드디어 한 잔 샀구나. 녀석들의 눈빛은 그렇게 젖어들었다.
  녀석들의 눈빛이 그처럼 젖어들었으니만큼 나는 마땅히 그 백원, 넉되 두 접시를 갚아야 옳았다. 그래야만 ‘드디어 한 잔 샀구나.’의 드라마는 보기좋게 마침표를 찍고 추억의 영화처럼 머릿속에 자리잡을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갚질 못했다. 나는 되도록이면 복사골 아낙의 엉덩이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슬슬 피했다. 분위기도 바꿀겸, 어때, 이젠 앵두꽃이나 사과꽃 핀 곳을 물색해볼까? 어쩌구, 나는 은근히 애꿏은 꽃까지 들먹이면서 아들들을 꼬드겼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수수꽃다리(라일락)이나 솜다리(에델바이스)라면 몰라도 아들들의 순정은 오로지 복사꽃에 바칠 것임!”
  세 아들이 순정론인지 동정론인지를 앞세우며 보기좋게 퇴짜를 놓으면 나는 양아들, 그럴싸한 구실이 없었으므로 머슥하니 쭐레쭐레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복사골 아낙은 한 번도 나를 마다 하지 않았다. 이러쿵 저러쿵 쓰다달다 백 원에 대한 안부의 말 한 마디도 없이 해마다 복사꽃은 피었다가 쓰러졌다.
  올해도 복사꽃은 내 가슴 깊숙한 텃밭에서 넉 되 두 접시 백 원어치만 피는구나! 그런 감회와 함께 나는 ‘대학이여 안녕’을 땅콩껍질 뱉듯 중얼거리며 푸른 군문으로 떠나버렸다.
  백 원짜리 백동화를 처음 본 것은 1970년 12월, 제대를 서너 달 앞두고 나온 마지막 휴가의 어느 날 오후였다. 앞면에는 이순신 장군의 초상이, 뒷면에는 액면 표시의 100이 초경을 마악 끝낸 길순이의 가슴처럼 도톰히 부풀어 오른 백동화. 처음 그 것을 본 순간 내 가슴도 덩달아 쿵쾅쿵쾅 부풀어 올랐다.
  그것은 내 눈을 찌를 듯이 눈부셨다. 아직 사람의 손때를 타지 않아서 일까? 이거, 혹시 ‘황야의 은화 일 불’이 아닐까? 나는 그 빛나는 순결성의 광택을 보며 얼미짐작하고 감탄했다.
  “네 마지막 휴가를 축하한다!”
  군가 한 번 못 부르고 카빈총의 개머리판 한 번도 못 잡아본 외아들이 미안하다는 듯 셈을 치렀다.
  “맏아들 막내아들이 제대하면 정식으로 우리 한 판 벌이자.”
  우리는 달랑 둘이었다. 맥주 너댓병의 조촐한 만남이 끝나자 외아들은 주머니에서 백동화를 꺼내 다가온 주인여자에게 다섯 개나 주었다.
  “이 세상에 나온 지 아직 한달도 채 안된거다.”
  드디어 의혹에 찬 내 눈빛을 발견한 외아들이 또 하나의 백동화를 보여주며 말했다.
  동 75%, 니켈 25%의 백동 고액주화… 외아들의 설명을 들으며 길순이의 가슴 아니 그 백 원짜리의 몸뚱이를 나는 설레이는 손길로 어루만졌다. 그것이 넉 되와 두 접시에서 두 접시는 그만두고 반 되도 못되는 이념으로 전락할 전주곡임을 미처 깨닫지도 못한 채.
  막내아들 맏아들도 제대한 뒤 우리들 아들들은 어쩌다 더러 맥주집엘 가곤 했다. 우리는 쇠고기 다섯 근 값으로 노래도 없이 술을 마셨다.
  외아들이 장가들기 전전날에도 마셨고 맏아들이 박사학위를 땄을 때도 마셨고 막내아들이 계장으로 승진했을 때도 우리는 마셔댔다.
  넉 되에 두 접시 만큼의 취기가 오를 때까지 우리는 맥주를 마셨다. 아가씨가 세명 있는, 조일(朝日)이라는 아크릴 간판이 붙은 그 맥주집에서 우리는 1970년대를 조심조심 마셨다.
  우리는 ‘조일’의 일본 발음이 아사히였으므로 그곳을 ‘아사히 바’라고 불렀다.
  아가씨가 셋 있었기는 했지만 그녀들은 언제나 길순이처럼 다소곳했다. 맥주 몇 잔을 걸치고 얼굴빛은 복사꽃처럼 발그레 피어야만 그제서야 드세용 드세용 콧소리를 내면서 비로소 맥주 매상에 안간힘을 쓰곤 했다. 우리는 움직이는 복사꽃을 바라보며 넉 되와 두 접시로 취하고 싶었지만 그러나 아사히 바의 맥주는 언제나 우리를 말똥말똥 북두칠성처럼 빛나게 했다. 맥주 열댓 병으로 우리의 발걸음을 비틀거리게 할 수는 없었다.
  맥주 한 병에 150원, 오징어 땅콩 한 접시에 300원.
 “자 이걸로 머릴 볶든지 지지든지 해라.”
  우리는 아가씨들에게 300원씩 주었다.
  주머니가 두둑한 날, 옛다 모르겠다 싶어 500원을 빼주면 여자는 뽀뽀 아니 보보라도 할 듯이 달려들었다.
  아들들의 아사히 바 맥주 행각은 그래서 언제나 이천 오백 몇십원쯤에서 그치곤 했다. 300원, 300원, 300원, 그건 물론 팁이었다.
  더러더러 나도 한잔 샀기 때문에 우리들의 우정은 지속되었던 것일까? 
  1973년 어느날 우리는 만원권을 손에 넣었고 1979년 어느날 맏아들은 신(新)만원권으로 술을 샀고 1983년 시월 어느날 외아들은 개(改)만원권으로 술을 샀고 우리들의 청춘은 쉴새없이 흘러갔다.
  “복사골에서 마시던 게 엊그제 같은데 33년이 지났군.”
  맏아들이 불쑥 말했다.
  “벌써 예수의 나인가?”
  외아들이 되받았다.
  “그럼 이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일만 남았군.”
  막내아들이 거들었다.
  지금 어디쯤에선가 1996년의 복사꽃도 지고 있으리라.
  무심코 혼잣말처럼 내가 내뱉자 맏아들이 가랑비처럼 말했다.
  “그곳에서 그대로, 여전히 있다는 거야.”
  그것은 복사골 아낙의 소식이었다.
  그래? 그렇다면…. 나는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나는 넉 되에 두 접시를 갚을 때가 뚜벅뚜벅 다가와서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아이구, 학상. 이젠 복사꽃두 없어. 그래두 마시면 안 취할까? 술은 있으니께.
  껌 세 개의 의미로 추락한 백원의 세월을 케인즈나 토마스 카일라일의 경제학은 어떻게 설명할까?
  맏아들 외아들 막내아들에게…. 나는 고회했다. 아들들은 33년만의 내 고백을 말없이 들었다.
  “지금 갚는다면… 도대체, 얼마쯤이면 그 백원을 갚을 수 있을까?”
  고백 끝에 나는 조심스럽게 아들들의 생각을 간청했다. 맥주 반 잔쯤의 침묵을 보내고 외아들이 복사꽃처럼 입술을 열었다.
  “바로 어제, 대학 다니는 내 아들 녀석이 바로 우리처럼, 넷이서 술을 마셨지.”
  맏아들의 눈빛이 물었다. 어디에서?
  “유성, 어느 나이트클럽에서.”
  “우린 복사골 식당의 빚 얘기를 하는 거야.”
  막내아들이 투정처럼 중얼거리자 외아들이 잔잔히 말을 막았다.
  “우리들의 복사골 식당이 우리들의 아들들에겐 유성의 나이트클럽이야, 언제나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서? 막내아들이 눈빛으로 말했다.
  “그런 곳에서, 우리들의 넉 되 두접시만큼 마시려면… 한 테이블에 네명이 앉으면, 그러니까 넉 되만큼 취하려면, 그러니까 두접시만큼 먹으려면… 양아들!”
  나는 엉겁결에 침을 꿀떡 삼키며 외아들을 바라보았다.
  “이십만원!”
  외아들이 소리쳤다. 물론 내 아들도 돈 꽤나 있는 집안의 아들에게서 얻어마셨다지만 그래 이십만원이야. 외아들이 그렇게 말을 끝냈다.
  “33년이 흘러버렸군”
  맏아들이 담배를 꺼내 물고 푸우 연기를 뿜어냈다. 그 연기 속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가 나는 사라져갔다.

 

약력

     김 수 남 (金秀男)

     ㆍ소설가, 아호는 글보.
     ㆍ196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조부 사망 급래」당선.
     ㆍ창작집 『유아라 보이』, 『달바라기』, 『개똥지빠귀가 우는 것은 슬퍼서가 아니다』,
                     『따라가서 앞지르라』등과 장편소설『취국』이 있음.
     ㆍ현재 대전성모여고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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