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인권협회 의장 진관스님을 만나

  “어떻게 나를 알고 찾아와?”
  의아해 하시면서도 반가운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진관스님. 학생운동의 역사속에서 인권을 유린당한 사람을 위해 한 평생을 살아온, 현재는 불교인권협회 의장으로 있는 분이다.
  양심수 석방의 근황을 묻는 질문에 “5ㆍ6공때보다 더하지. 그때에는 사회적으로 거론이라도 됐는데, 지금은 아예 거론도 아니, 오히려 역행하는 셈이야.” 순간 어두운 그늘이 얼굴에 스친다. 장기수는 현재 80여명이 있고, 대전교도소에 제일 많단다. 장기수중에 제일 안타깝게 이들이 전쟁포로로 제네바 협정에서 잘못되어 고향인 평양에도 못 가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조금 있으면 추석이잖아…” 그래서 요즘 더욱더 생각이 많이 난다고 한다.
  이번 연대사건으로 인해 4백50여명의 양심수가 늘어났다며, “양심수들을 석방하기 위해 민ㆍ변이 애쓰고 있지만, 힘이 너무 약해. 그래서 이번에 국제인권회에 관련 자료를 보내고,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지.” 그리고 구속된 4백50여명의 학생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스님이 손수 그린 그림을 주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마치 당연히 해야 할 것을 하는 것처럼, 한 명도 아닌 그 많은 학생에게 직접 전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학생들의 힘이 필요해. 대대적으로 서명운동을 하고, 이제는 각 대학에 인권위원회를 만들어서 학생 스스로의 인권을 지켜야지”라고 강조한다.
  거침없이 얘기하다가 “혹시 연세가…”라는 질문에 머뭇거린다. 대답대신 하하하 웃더니, 마치 사춘기의 소년같이 나이는 묻지 말라고 손을 휘젓는다. “전라도에서 태어났지. 이래봐도 어렸을때에는 동네색시에게 인기가 많았어. 응? 스님이 된 동기? 그냥 무작정 스님이 되겠다고 집을 나왔어. 시를 좋아해서 만해 한용운님 같은 스님시인이 되려고 했지. 처음에는 자연주의 경향의 시를 쓰곤 했는데… 하하하” 스님의 얘기를 꺼내면서 웃음이 많아진다.
  하지만, 시인이 되고자 했던 마음은 4ㆍ19때 희생된 학생들의 묘지를 둘러보면서 고이 묻었단다. 더 이상 종교적인 범위안에서 머무를 수만은 없다고 느껴져서… 그때부터 학생들과 함께, 학생들을 위해 활동했다. 그리고 이젠 어떻한 상황에서도 민족을 버릴 수 없다고 거듭 강조한다. “그러나 오해는 말게. 난 민족을 구원한다는 생각으로 일하지 않아. 다만, 언제까지나 민족과 함께 하고자 할 뿐이야.” 그래서 그랬던가. 대화도중에 순간순간 엿볼수 있었던 당당함. 그리고 인생의 깊이를 느끼게 하는 미소가 말이다.
  마지막으로 많은 양심수 손에 쥐어 주었던 손수 그린 그림을 건네 주고, 몇권의 책을 손에 쥐어주며, 다음을 기약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난 내가 하는 일에는 후회를 안하네. 미래가 있으니까.” 문득 ‘미래’라는 말에 문을 나오면서 스님의 나이를 헤아려 보았다.
  아마도 10대가 아니실까?

박은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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