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년 대선 속의 87년

 97년 대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린 무엇을 할수 있으며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쉽지 않다. 97년 대선 이란 격류속에선 대선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시야가 제약되기에 과거의 대선 정국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두환 정권을 계승 · 유지하기 위하여 내각제로의 합의 개헌을 골자로 하는 보수 대연합을 추진했다. 민족주진영(이하 민민진영)을 탄압함으로 민민진영과 세를 같이하는 야권을 약화 시키려 했다. 86년 세계 최대의 구속자를 낸 건국대 사태는 정권의 민민진영에 대한 탄압을 잘나타낸다. 87년 1월 박종철군 고문 치사 사건으로 인해 정부의 본질이 밝혀지고 이는 전국민적인 자세를 취했던 민족통일연합을 중심으로 하는 실질적 단일후보의 ‘비판적 지지’론, ‘요구’하는 수준의 탁상공론에 머무른 ‘후보단일화론’과 양김씨의 싸움에 실망을 느껴, 비교적 힘을 모았던 ‘독자 후보론’이 있었지만 이역시 후보 단일화를 성사 시키지 못했다.
 더욱이 정부는 85년의 건국대 사태를 책임지며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여 상대적으로 취약했던 김대중씨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비공개로 열린 국방부의 기자간담회 내용중 ‘군부의 김대중에 대한 불만적 시선’을 유출하여 여론화 시킴으로 반사 이익을 가져오게 했다. 이 속에서 양김씨는 자신들의 지지율이 노태우 보다 높음을 인지하고 팽팽한 대립을 계속유지하게 된다. 그러나 전두환정권은 아무리 양김이 분열하였다 해도 공정 선거를 통해서 권력을 유지 할수 없음을 알고 수많은 부정 선거를 자행했다.
 또한 대한 항공기 폭파 사건이 11월 29일 발생함으로 야권표의 상당 부분이 이탈했고 이 가운데 금권 · 관권 선거가 진행됐다. 우선 군부재자 투표에서 비밀 선거의 원칙이 지켜지지 못한채 부대장앞에서의 기표가 이루어졌다. 결국 수많은 비리에도 불구하고 노태우후보는 겨우 36.6%의 득표로 당선 되었다.
 민민진영은 87년의 대선에서 야권을 통일시켜 집권세력에 대항할 힘을 모았어야 했음에도 오히려 야권의 분열에 영향을 받아 자신들까지 분열하였다. 민민진영은 야권에 얽매여 큰것을 보지 못하고 작은 것에 연연하는 과오를 범하였다. 과거의 대선에서 어떠한 후보를 선택 하느냐하는 ‘결론’의 문제에 치중했던 과오를 범했다면 이젠 어떠한 후보를 선택하든지 올바른 정치를 할수 밖에 없도록 과정을 꾸려나가는 ‘과정’의 문제로 자리매김 해야 할 것이다.

이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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