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phia

  인간이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는 때는 언제인가? 생물학적으로는 심장이 혈액을 순환시켜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해 줌으로써 생명 활동을 지속해 나갈 수 있을 때 인간은 살아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인간이 진정으로 살아있다고 볼 수 있는가? 다시 말해서, 목숨을 부지하는 것만으로 인간다운 삶을 살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필자는 세상에 질문을 던지며 살아갈 때 인간이 진정으로 살아 있다고 생각한다.

  플라톤의 대화편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 소크라테스는 “음미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단언한다. 삶을 음미한다는 것은 살아온 나날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고 그에 답하고자 노력하며 깊게 숙고하는 것이다. 의식적으로 삶을 잡아채지 않는다면, 삶은 사유의 틈새로 유유히 흘러가 버린다. 자신을 기다려주지 않고 훌쩍 떠나버린 시간에 깜짝 놀라고, 어느새 늙어버린 자신을 발견하여 지나온 세월을 한탄하게 된다. 삶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내지 않는 방법은 자신이 어떠한 일을 해왔는지, 그로부터 어떤 유익한 것을 배웠는지 끊임없이 생각해 보는 것이다.

  훌륭한 예술 작품은 그것을 접할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준다. 이전에 미처 보지 못했던 일면을 새로이 발견하기도 하고, 색다른 해석이 불현듯 머릿속에 떠오르기도 한다. 인생은 이러한 예술 작품과 같다. 어릴 때 겪은 일들을 한층 성숙해진 나이에 다시금 떠올려보면 얻어가는 것이 많다. 경험은 진귀한 보석의 원석으로, 스스로에 던지는 질문을 통해 끊임없이 가공해야만 진정한 가치를 지닌다.

  지금까지 스스로에 대해서만 던지는 질문을 논하였으나, 질문의 대상은 비단 자신에 국한되지 않는다. 느끼고 상상하고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개인의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나 세상에 질문을 던지기 시작할 때 지성의 경계는 대양과도 같이 넓어진다. 삭막하고 따분하게만 보이던 세상은 비로소 탐구와 사유의 샘물이 된다.

  시선을 넓은 세상으로 돌리면, 흥미롭고 다채로운 질문들이 쏟아져나온다. 사람은 왜 사랑에 빠질까? 사람은 왜 타인과 교류하는 데서 즐거움을 얻고, 타인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는 걸까? 작은 상자부터 행성까지, 무엇이 질량을 가진 물체를 움직이는 걸까? 자연의 언어인 수학을 통해 세상의 모든 현상을 기술해 낼 수 있을까? 사람은 어떠한 근거로 선택하는 걸까? 보편적인 진리는 존재할까? 사회에 있어 가장 바람직한 제도는 무엇일까? 이상과 같은 질문들을 생각해 보며 사람들이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그러나 질문을 던지는 삶이 반드시 만족스럽고 편안한 삶은 아니다. 질문은 익숙한 것에서 낯섦을 발견하는 것이다. 질문은 의구심이다. 안락하고 태평한 삶에 격변을 가져오는 천둥 벼락이다. 사람은 질문함으로써 확신의 요람에서 혼돈의 무덤으로 내던져진다. 이곳에서는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 같은 강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 사람은 끊임없이 확신의 안식처를 찾아 방황하게 된다.

  혹자는 “이러한 불안과 좌절을 감내하고서라도 질문하는 삶이 진정으로 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필자에게 물을지 모른다. 필자는 그렇다고 긍정한다. 청춘의 방황이 결과에 상관없이 그 자체로 가치 있듯이, 답할 수 없을지 모르는 질문을 던지는 것도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다. 이것은 더 나은 내일을 위한 끝없는 도전이다. 매일을 정복한 자만이 자유를 누린다. 

최승혁 (경제학·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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