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 지음, 최지수 옮김,  『서사의 위기』
한병철 지음, 최지수 옮김, 『서사의 위기』

  익숙하고 진부한 서두가 몇 가지 있다. ‘21세기는 문화의 시대다’라든지 ‘21세기는 정보화의 시대이다’와 같은 것들이다. 그러한 글에서는 보통 요즘 주목받는 문화콘텐츠라든지 미디어, 혹은 플랫폼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면서 세상은 언제나 변화한다고 하지만, 세상이 늘어나고 있지 않은 이상 이것이 변화한다는 것은 ‘정보화’나 ‘문화’는 다른 무언가들 위에 놓였다는 뜻일 것이다. 한병철은 현대사회를 진단하며 넘쳐나게 된 정보와 스토리 밑에, 서사가 있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정보와 스토리의 시대일수록, 서사는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사의 위기』에서는 먼저 위기를 맞은 서사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야기는 정보와 대비되는데, 모든 것을 해석하고 현실에 즉각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정보와 달리 설명과 해석이 들어있지 않다. 이러한 이야기는 사회구성원들을 모이게 하며, 이로 인해 안정적인 공동체가 형성되어 왔다고 말한다. 그리고 벤야민을 인용하며 이야기하는 사람은 이야기를 듣는 이들에게 조언을 주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설명과 해석 없는 이야기는 청자에게 전달되면서 이야기가 어떻게 이어지면 좋을지에 대한 제안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근대에 와서 이러한 이야기는 최초로 위기를 맞게 된다. 바로 근대 소설에 의해서이다.

  방금 서사를 ‘이야기’라고 말했으나, 책에서 논하고 있는 이야기는 말 그대로 서사이지 스토리가 아니다. 근대 소설과 저자가 말하고 있는 서사, 즉 이야기의 차이는 소설이 공동체가 아닌 개인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또한 작가의 해석이나 심리적 맥락이 포함되어 있어 그것들이 독자에게 주입된다. 이러한 근대에 대해 벤야민은 경험이 그 가치를 잃었으며, 사람들은 현실의 경험에서 자유로워지기를 갈망하게 된다고 보았다. 경험이 결핍된 삶에는 생존만이 남게 되는데, 벤야민은 사람들이 경험으로부터의 자유를, 비밀없음을, 결과적으로 아우라 없음을 신봉하게 된다고 말한다.

  근대를 지난 지금은 정보가 서사의 자리에 있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SNS 플랫폼을 예시로 이를 설명하는데, 주를 이루는 짧은 영상들에는 어떠한 서사적인 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야기가 아닌 시각적 정보에 불과하다. 비단 플랫폼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예를 들어 사진의 경우도 그렇게 변화했다고 보고 있다. 이전에는 기억을 위해 사진을 찍었다면 이제 사진은 다른 이들과 소통을 위해서 사용되는 점을 지적한다. 삶은 기록되지 않으며, 누구나 자신의 삶을 게시할 것을 요구받는다. 또한 이러한 게시글들은 더 이상 광고와 구별하기 어려운, 오로지 순간만이 중요한 것이지 이야기가 아니라고 보고 있다. 모든 것을 드러내고, 설명하는 정보와 데이터일 뿐인 것이다. 현대의 스토리텔링 역시 그렇다고 말한다. 스토리텔링은 일차적으로 상업과 소비를 뜻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스토리셀링(story-selling)으로서의 스토리텔링은 이야기처럼 사회를 변화시킬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렇게 모두가 정보를 쏟아내고, 삶은 측정되어 정보와 데이터가 되고, 그 안에 살아감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서사가 없는 채로, 즉 역사가 없는 채로 존재하게 된다.

  이 책을 읽은 후, 누군가는 저자가 설명하는 현대사회의 모습에 동의하게 될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어딘가 의문이 생길 수 있다. 혹은 책의 한 부분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책에 나온 다른 저자들의 저서를 찾아보고 싶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떠한 정답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이 책을 추천하기보다는, 사유의 시작으로서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누구나 하나쯤은 OTT를 구독하고, SNS가 일상이 되고, 영상 콘텐츠를 만드는 일이 흔하게 된 현재를 생각하며 읽는다면, 어떤 방향으로든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라고 본다.

최수이 (언론정보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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