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칼럼

  구미에서 초등학교를 같이 다닌 친구가 유성 반석동으로 이사를 간지 3년 만에 온 가족이 다 함께 친구네 집을 방문했다. 2008년이었다. 어른들이 밥상에 둘러 앉아 샤부샤부에 이야기꽃을 피우는 동안 친구는 집 근처 영화관에 <공공의 적>을 보러 가자고 했다. 노은역은 친구 집에서 지하철로 두 정거장 거리였는데 우리 말고 손님이 딱 두 명 있었다. 반석동이나 지하철이나 모두 반듯하고 깨끗하고 조용했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초등학교 6학년 때 소풍으로 대전동물원을 왔었다. 매번 대구의 우방타워랜드에 가는 데 지친 우리 지역 선생님들이 새로 문을 연 소풍지를 발굴해 낸 것이다. 자이로드롭을 타면서 멀리 내다봤던 대전은 내가 살던 경상북도와 달리 멀리까지도 땅이 평평했다. 대전에 대한 기억은 93년도 대전엑스포에서 엄마 품에 안겨 찍힌 사진을 제외하면 그때가 처음이었다. 지금은 대전에 산 지 13년 차가 되어서 궁동 거리는 눈 감고도 굴러다닐 수 있고 지하철역을 모두 외우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때는 생소하기만 했다.

  대전시나 대전관광공사는 나름대로 마케팅에 공을 들이고 있겠지만 사람들이 대전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나 떠올리는 이미지는 이처럼 파편화되어 있는 것 같다. 지역 간 교류가 늘어나고 인터넷에서 지역에 대한 이야기들이 퍼지면서 그나마 몇 가지 키워드를 가지게 된 게 노잼, 성심당 정도다. 그래서 직접 와본 사람들은 카페가 널찍해서 좋더라, 칼국수가 맛있더라, 갑천이 예쁘더라, 사람이 별로 없더라 자잘한 이야기를 남겨주고 간다.

  얼마 전에는 대전에 살지 않는데 자주 오게 된 분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문학계 내 성폭력을 최초로 고발했으나 오히려 명예훼손 죄로 고소당했고 가해자에 의해 신상정보가 온라인상에 퍼져 반소를 한 분이었다. 이 분이 대전에 오게 된 이유는 가해자인 박모 시인이 대전시 동구에 주소지를 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미성년자였던 피해자는 20살에 재판을 시작해 5년간 재판을 위해 수차례 대전을 방문했다. 20대의 절반을 재판으로, 그 과정을 대전에서 겪었다.

  내가 이 사람을 만난 날은 박모 시인에 대한 정보통신법 위반 항소심 판결이 나는 공판 날이었다. 대전지방법원 안은 사람들로 붐볐다. 항소심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내렸던 원심이 가볍다고 판단하여 파기하고 실형 1년 8개월을 선고했다. 피해자에 연대하여 법정에 왔던 사람 10명 중 나를 제외한 모두가 대전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는 스타벅스 대전법원점에서 음료로 축하의 짠을 했고 대구와 서울 등지에서 온 연대자들은 대전법원점을 기념하겠다며 영수증 사진을 찍어갔다. 근처 중고 책 서점에 왔다가 들르기도 하는 일상적인 장소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보며 낯섦을 느꼈다.

  나조차도 대전 법원이 보수적이라는 소문을 익히 들어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올까 봐 긴장하며 갔었다. 다행히 판사의 합리적인 판결에 피해자는 5년 만에 환히 웃었다. 피해자는 와줘서 고맙다며 언젠가 밥을 꼭 먹자고 전화번호를 주고 갔다. 나는 대전에 또 오면 성심당 말고도 갈 곳이 많다고 했고 그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던 대전에 지인이 생겨 기쁘다고 했다. 우리는 대전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날지도 모르지만, 대전에 대한 더 좋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을 것이다.

공연화 (여성젠더학과 석사과정) 

저작권자 © 충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