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칼럼

  10년 만에 미국을 방문했다. 10년 전에 갔던 뉴욕과 이번에 간 LA는 전혀 다른 나라처럼 느껴졌다. 칼바람이 불던 삭막한 월스트리트와 멋대로 큰 소리로 웃는 사람이 가득한 LA를 비교하면 지는 해의 색깔조차 달랐다. LA는 오히려 시드니와 비슷한 분위기가 났다.

  시드니에서 묵은 호텔 1층에는 카페가 있었는데 손님이 전혀 없는 시간에도 항상 직원이 네 명은 있었다. 이번에 들른 로컬 카페도 그랬다. 손님이 여덟 명 있었는데 직원이 아홉 명 있었다. 타투가 없는 직원이 없었고 3부 바지를 입은 남자, 화장을 하지 않은 여자, 머리 길이도 제각각이었다.

  LA에서 만난 상점, 공항, 호텔 직원들은 자꾸만 말을 걸어와서 낯선 사람을 불편해하는 친구들이 진땀을 흘렸다. 성심당에 가면 1분에도 수 명의 방문객이 계산을 마치고 떠나는데, 여기는 뒤에 사람들이 잔뜩 줄을 서 있어도 꼭 인사를 하고 말을 걸었다. 로컬 카페의 직원은 우리가 한국인임을 알아보고 지난주에 한국에 다녀왔다며 계산을 멈추고 스마트폰의 갤러리를 열어 한국의 유명 로스터리 카페에 다녀온 것을 보여주었다. 본인이 카페 사장 친구의 딸이란 것까지 커피와 빵을 주문하는 그 짧은 시간에 전했다. 시쳇말로 TMI(Too much information)다. 한국인들은 뒷사람이 기다릴 것을 걱정하며 초조해져서, 스몰 토크에 익숙하지 않아서 더 이상의 말을 차단하고 주문을 마치곤 했다.

  운전을 하며 지나가는 거리에는 마약에 취해 앉아서 잠을 자거나 말 그대로 길바닥에 누워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차 안에 있어 망정이지, LA 공항에 내리자마자 “총기 범죄와 노숙자 범죄가 다발하니 주의하라”는 외교부의 문자를 받은 터라 어느 정도 긴장이 되었던 건 사실이다. 도심임에도 정류장 하나에 버스 한 노선만 운영되는 대중교통 시스템도 이유겠지만 걸어 다니는 사람이 없는 이유를 알만했다.

  우리가 묵은 지역은 웨스트 할리우드로, 나름대로 서부 미국 커뮤니티를 뒤져 안전한 곳으로 정한 숙소였다. 실제로 숙소 건물에 딸린 마트는 유기농과 로컬, 동물복지 제품만 취급한다는 고급 식료품 상점이었다. 여행 첫날 아무것도 모른 채 저녁 장을 보러 식료품점에 들렀다가 물 한 통과 맥주 12캔, 계란, 잼, 식빵(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아 할인하는 품목이었다)을 사고 6만 5천 원을 내고는 눈 뜨고 코 베였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조금 떨어진 곳의 대형 마트에서 비슷한 품목을 사고 3만 원을 지불하고서야 깨달은 것이다.

  하루는 길가에 주차하려고 레지던스 아파트 뒤쪽으로 두 블록 차를 몰았다가 커다란 텐트가 두 채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밭수목원이나 유림공원에서 볼 수 있는 캠핑용 텐트 말고 낡은 현수막 같은 걸로 얼기설기 지어진 때 묻은 움막이었다. 

  우리가 묵은 레지던스에는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야외 수영장의 물이 넘쳤고 피트니스 센터는 24시간 불이 켜져 언제든지 운동을 할 수 있었다. 라운지에서는 가끔 대마초 냄새가 나서 우리가 눈살을 찌푸리고 피하기도 했다. 뒤꿈치가 동그랗게 뚫린 양말을 신고 텐트로 향하는 사람을 보며 그들과 분리될 수 있는 아파트로 얼른 숨어 들어갔다.

  LA와 우리나라를 생각하면서 이상하게 서울과 대전이 떠오르기도 했다. 우리는 LA를 사랑했지만, LA에 영원히 살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나는 우리나라에 자유가 없다고 말했고, 한 친구는 미국에 자유가 너무 많다고 말했다. 

 

공연화 (여성젠더학과 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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