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는 “설거지는 할 만한데 요리를 못 해 먹겠다”했고 나는 그 발언에 정확히 반대로 공감했다. “요리를 하면 음식이 생기잖아, 그런데 설거지를 하면… 무엇도 생기질 않잖아. 그래서 싫어. 재미도, 성취감도 없고” 싫은 이유는 끝도 없이 이어지는데 내 입에서 나오는 문장 중에서 내 마음을 정말로 대변하는 것은 한 마디도 없었다. 화제가 전환되는 와중에도 남은 변론은 혀 위에서 쓴맛을 남긴다. 나는 어쩌다 설거지를 싫어하는 사람이 되었나. 그것은 숙제였다.

  4월의 캠퍼스는 어떤 불행도 침입할 수 없는 별세계여서 나는 공연히 머쓱하다. 공기가 다르다는 표현의 의미를 들숨으로 알게 되는 공간에서 사람들은 웃거나 행복하거나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하거나, 혹은 그렇게 보이려고 하거나 한다. 그것이 젊음의 의무인 것처럼. 과잠이나 블루투스 스피커는 눈 뜨고 귀를 열 때마다 내가 발 딛고 선 곳이 어디인지 말하는 이정표 같고, 나도 새 신발 하나 살까 생각하게 한다. 어제는 반소매를 입었다가 오늘은 패딩을 입게 하는 날씨의 변덕 속에서도 어떤 얼굴들은 정성스레 포장한 선물처럼 환하고, 나는 그런 면면에서 부끄러움 없는 마음을 읽었다.

  봄은 무엇 때문에 아름답나. 조던 신고 카고 바지 입고 아이패드 들고 걷는 젊음에게 당신은 어떤 방황을 숨기고 있는지 묻고 싶었다. 아침이 오지 않으리라고 믿게 만드는 절망 앞에서 매일을 어떻게 버티는지 알고 싶었다. 어느 날은 세상에 내 의지대로 되지 않는 일이 너무 많다는 일기를 쓰다가 관뒀다. 그건 마치 내 의지대로 되는 일도 있다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에. 

  그러니까, 4월. 모든 사건이 시작될 것 같은 4월의 봄. 문제는 내가 하필 4월에 좌절과 비관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된 것. 그리고 설거지를 싫어하는 사람이 된 것. 호가 아닌 불호가 나를 얼마나 설명할 수 있을까?

  후련하기만 한 이별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고민하면 하루가 빨리 지나간다. 크고 작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살았다. 모든 것에 끝이 있다는 진리는 어느 날엔 해방 같고 그다음 날엔 족쇄 같아서 나는 그 변덕을 받아들이기 위해 술도 마셨고, 술김에 전화 걸어서 너 같은 애랑 앞으로 볼 일 없으리라 호언장담했고, 그 말을 꺼내자마자 후회도 했다. 

  너를 만나서 행복하다는 말은 기쁘고 무겁다. 너 없어서 슬프다는 말은 덜 기쁘고 더 무겁다. 그러니 무엇보다 무거운 짐은 너를 만나고 헤어진 후에도 아무렇지 않다는 말이다. 주어진 역할이 없다는 절망감 앞에서 나는 얼마까지고 작아질 수 있다. 수천 번의 4월이 지나도 이별은 두려울 것 같고 시작은 내 것이 아닌 이야기 같다. 

  결말을 내리겠다는 다짐에 얼마만큼의 두려움이 필요한지 나는 알고 있다. 식사가 끝난 후 밀려 있는 설거지를 끝내는 데에 얼마만큼의 용기가 요구되는지 모르는 바 아니다. 두려움은 모든 용기에 선행한다. 4월은 흘러가고 나는 밥을 짓듯 5월의 두려움을 미리 준비한다. 유비무환을 믿는다. 

  모든 작별이 불안한 동시에 어떤 시작은 두려움 속에서 피어나야 하는 일. 미래는 알 수 없고, 나는 땅에 두 발 딛고 서 있고. 캠퍼스의 초록은 끊이지 않고, 새 카고바지는 배송 중이고. 그러니까 이제는 미뤄 두었던 오늘의 설거지를 해치우는 수밖엔.

김현진 (디자인창의학·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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