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기다리는 때에는 아직 봄이 아닌 모든 순간이 허송세월 같다. 여태 남아 있는 지난 해 미련과, 지키지 못한 새해 목표를 씻은 듯이 극복하겠다는 마음은 아침마다 의식처럼 그 날의 최고 온도를 찾아보게 한다. 2월의 공기에는 희망이 소문처럼 파다하다. 두꺼운 옷이 옷장으로 돌아가고 벚꽃이 피면 마법처럼 모든 것이 바뀔 것이라는 희망. 작금의 삶은 어딘가 잘못되었고 계절의 흐름만이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다는 맹신.

  심란하고 싶을 때는 생각을 하면 된다. 아무 생각이나 하면 그만이다. 세 단계 이상 생각하는 행위는 우울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나는 모든 이야기에서 불안을 읽을 수 있었다. 겹겹이 쌓여가는 생각 안에서는 일어나서는 안 될 일들이 너무 많았고, 해서는 안 될 말들이 너무 많고, 느껴서는 안 될 감정이 너무 많기에.

  우울은 설탕 같은 것. 모든 곳에 들어 있고 나를 중독시키고, 없으면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마음을 바쁘게 재촉하고 안달하게 하는 감미료 같은 존재. 우울은 우울하지 않은 나를 낯선 이로 만든다. 불안하지 않은 하루를 헛된 시간 낭비로 만들고, 오지 않은 내일을 예견된 실패로 착각하게 한다. 언제나 진심이 아니지만 내가 느끼는 것 중 가장 절박하다. 내일 죽어도 여한 없을 듯이 행복한 순간에도 불쑥 튀어나오는 마음의 술렁임이 있었다. 그것은 온라인 기사에서 만나는 팝업 광고처럼 느닷없지만, 예상할 수 있기에 새삼스럽지 않은 감정. 그러나 감정은 광고처럼 클릭 한 번으로 끌 수 없는 일이기에 우리는 불행하다. 나는 불행한 어느 날마다 재미도 교훈도 없는 영화를 억지로 보고 있는 기분이 된다. 엔딩 크레딧은 끝도 없이 위로, 위로 올라가기만 하고, 객석에 남은 사람은 나 혼자였으나 내 곁에 앉아 있던 그 누구도 홀로 상영관을 지키라고 내게 요구한 적 없었다.

  우울이 설탕이라면 행복은 알약. 알약은 설탕이나 알코올처럼 나를 마셔요, 삼켜 주세요, 라고 외치지 않는다. 행복은 점잖고, 여상스럽고, 늘 그 자리에 있다. 나는 불행하기에 행복이 간절하고, 행복은 행복하기에 내가 간절하지 않다. 불행은 액상과당처럼 나를 찾아오고, “제로 콜라도 있어요?”라고 물어보며 스스로 피해야 하는데 어째서 행복은 직접 발 벗고 찾아 나서야만 하나. 행복을 기다리는 모든 순간은 무엇 때문에 불행보다도 더 불행하고, 봄을 기다리는 겨울은 겨울보다 더 춥기만 하고……. 

  오늘 먹어야 하는 영양제를 내일로 미루며 나는 행복이 찾기 어렵다고 믿는다. 나는 약을 잘 삼키는 사람인데. 한 알이고 다섯 알이고 단숨에 삼킬 수 있는데. 손만 뻗으면 닿을 것을 잡지 않는 것은 내 습관일까. 행복은 어려운 일이어야 하는데 손 안의 알약은 왜 동그랗고 쉽게만 보일까. 오늘 아침에는 집을 나서기 전에 영양제를 챙겨 먹었다. 비타민 한 알과 유산균 한 포가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쉬운 일이라고 다 쉽지는 않다는 생각을 한다. 철분제는 저녁에 먹으려 남겨 두었다.

  우울하고 싶을 땐 생각을 한다. 그러나 행복하고 싶을 때도 생각을 한다. 내 손을 떠난 편지와 내가 받은 편지, 무심코 던진 농담에 웃는 얼굴과 목소리들, 내게 없는 것을 손에 넣고 싶게 하는 욕망, 플레이리스트, 날씨, 숨길 수 없는 마음, 나를 부르던 목소리……. 엄마가 택배로 부쳐 준 영양제는 잠들기 전에 생각하려 남겨 두었다.

김현진 (디자인창의학·4)

저작권자 © 충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