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상공론

  1차원에선 2차원을 인식할 수 없고, 2차원에선 3차원을 인식할 수 없고, 3차원에선 4차원을 인식할 수 없다. 2차원 세계에 3차원 물질이 등장해도 3차원 물질의 단면만 볼 수 있기에 그것이 3차원 물질임을 인식하지 못한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이론도 제시할 수 있다. 그는 우리에게 사람들이 태어난 때부터 갇혀 어두운 뒷벽을 향해 묶여있는 동굴을 상상해보라고 한다. 그 사람들은 ‘죄수’들이며 오직 앞쪽만 향할 수 있다. 그 죄수들 뒤에서 밝은 불이 있어서, 그것이 그들이 향하고 있는 벽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불과 죄수들 사이에는 성곽이 있다. 그것을 따라 이따금씩 사람들이 걷어 다니고 다양한 물건들을 들고 다닌다. 그리하여 이 물건들의 그림자들이 벽에 드리워진다. 이 그림자들은 죄수들이 세상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이다. 그들은 실제 대상 자체에 대한 개념을 갖고 있지 않다. 만일 그 죄수 가운데 한 명이 어쩌다 묶인 몸을 풀고 몸을 돌린다면, 그는 그 대상 자체를 볼 것이다. 그러나 평생 갖혀 있는 상태에서 나온 탓에, 그는 혼동스럽게될 뿐만 아니라 불 때문에 눈이 부셔서, 아마도 틀림없이 그가 알고 있는 유일한 실재인 벽을 향해 다시 돌아설 것이다.

  플라톤은 우리 감각이 물질 세계에서 인식하는 모든 것은 동굴 벽에 비친 이미지, 즉 실재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믿는다. 이 믿음이 그의 형상이론의 기반이다. 우리가 우리의 감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지상의 모든 물체에 대해 이데아 세계에는 영원하고 완전한 그 물체의 실재인 형상(이데아)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감각을 통해 인식하는 것은 실재의 불완전한 그림자의 경험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물체들에 대한 진정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 우리는 기껏해야 견해는 가질 수 있을 것이지만, 진정한 지식은 이데아의 연구에서 올 수 있을 뿐이고, 그것은 우리의 기만적인 감각을 통해서가 아닌 이성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두 개의 뚜렷한 세계, 즉 겉모습의 한 세계와 플라톤이 실재로 간주하는 다른 한 세계를 이와 같이 분리시키는 것은 또한 것으로 변하는 세계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찾는 문제를 해결한다. 물질세계는 변화에 영향을 받을 수 있지만.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는 영원하고 불변이다.

  결국 세상은 뇌가 만든 가상현실이다. 뇌가 다르면 보는 세상도 다르며 인식은 환영(Illusion)이다. 이것은 나와는 전혀 다른 세상을 보고 있는 상대방의 언어를 이해하는 하나의 틀을 마련해주며 또한 앞으로 나아가는데에 첫 단계는 자신이 속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임을 이야기 해준다. 우리는 본질과 진실을 보지 못한다. 누구도 진실을 보지 못한다. 누구도 진실을 말할 수 없다. 누가 옳고 그르다고 할 수 없다. 절대 내가 보지 못하는 부분과 그래서 역설적으로 자신이 절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음을 인식함으로서 다른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나와 존재부터 다른 인간과 살아가는 데, 나의 인식 너머에 호기심을 갖는 데 유용한 이론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난 우리가 보지 못하는 본질이 있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모든 것에 원형이 있다는 것엔 별로 설득되지 않는다. 관련된 여담으로 애인과 함께 있을 때 시간이 마치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우리는 단순히 ‘당신과 있을 땐 시간이 너무 빨라’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고, 그동안 겪었던 시간 흐름과는 다르다는 것을 확연히 느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이라는 건 무게가 존재해서, 중력에 영향을 줘 시간이 정말 보통과는 다르게 흐르는 것은 아닌가 하는 가설을 세웠다. 감정에 무게가 없다하지만 우리는 3차원에 살고 있고 4차원(혹은 그 이상)의 세계에서는 감정에 무게가 있을 수도 있다.(사랑이 감정인가?) 어쨌든 하고 싶은 말은 사랑 그것은 차원을 넘나드는 경험을 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곽승민 (철학·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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