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양차 세계대전을 겪었던 독일 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어느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이란 시가 있다. “성문이 일곱 개나 되는 테베는 누가 건설했는가?/책 속에는 왕들의 이름만 나와 있다./왕들이 손수 돌덩이를 운반해 왔을까?/... /만리장성을 다 쌓은 날 저녁, 벽돌공들은 어디로 갔나?/...스페인의 필리프 왕은 그의 함대가 침몰했을 때 울었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울지 않았을까?” 만리장성은 진시황제의 치적이라고 배울 때 그걸 쌓느라 얼마나 많은 노역자가 돌무더기에 깔려 죽었을지 궁금해 했던 것 같지는 않다. 대학에 와서 브레히트의 시를 읽었을 때는 필리프 왕의 무적함대가 침몰한 후 전사한 아들의 시신도 못 찾고 통곡했을 부모들의 모습을 상상했다. 역사란 ‘지배자의 기록’이며 실제로 고통과 희생을 감내한 평범한 이들의 삶의 이야기는 건너뛰기 때문에 후대도 그들의 희생을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내가 이해한 이 시의 메시지이다.   

  독일을 비롯한 몇몇 유럽국가에 가면 인도에 “걸림돌”이라 불리는 동판 블록을 발견할 수 있다. 2차 대전 당시 집단수용소로 끌려간 사람이 살았던 집 앞에 놓인 블록인데 거기에는 그 사람의 이름, 탄생과 사망년도, 그리고 사망한 장소(주로 집단수용소)가 새겨져 있다. 보행자가 길을 걷다가 그 위를 지날 때 잠시라도 그 블록에 새겨진 글을 읽기 위해 멈추라는 의미에서 “걸림돌”이란 명칭을 붙인 것인데 독일에서 시작된 민간 추모사업의 일환이다. 2차 대전의 패전국이면서 동시에 유대인 학살을 비롯한 인종주의 범죄의 가해국인 독일은 참회의 뜻으로 막대한 금전적 보상과 함께 희생자를 기리는 박물관과 아카이브, 대규모 기념비들을 건립했다. 그렇지만 이 “걸림돌”은 희생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잊지 말자는 취지에서 만든 독특한 형태의 추모비이다. 길바닥에 깔아 놓아서 쉽게 더러워지더라도 희생된 이를 항상 기억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일부러 찾아다니며 올려다보는 화려한 기념비가 아니라 일상에서 마주치는 가까운 곳에 둘 수 있는 작고 소박한 형태를 선택한 것이다. 걸림돌이 자기 집 앞에 놓인 주민은 매일 그 돌을 보면서 과거 그 집에 살았던 희생자의 삶을 상기하는 심적 부담을 감수해야 할 텐데도 많은 이들이 이 추모 사업에 참여했다.  

  올해 여름 독일 카셀 대학교 학생회가 교내에 평화의 소녀상을 세우겠다고 결정하고 학교본부가 이를 승인한 것도 위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 평화의 소녀상은 일본 군국주의 전쟁 당시 “종군위안부”라는 명목으로 어린 나이에 몸과 마음을 유린당했던 여성들, 거대한 역사의 부차적 희생물로 잊힐 뻔한 여성들의 고통을 기억함으로써 이들을 애도하고자 만든 추모비이다. 비록 개개인을 하나씩 추모하는 것은 아니지만 약자들의 고통을 기억하고자 하는 의지의 산물이다. 그리고 이제 평화의 소녀상은 세계 도처의 크고 작은 전쟁터에서 자행되는 성폭력 피해자의 인권을 대변하고 평화를 호소하는 상징으로 그 의의가 넓어졌다. 

  그런데 외국 대학 교정에도 세워진 이 작은 소녀상이 지금 충남대학의 드넓은 교정에서 단 한 뼘의 설 자리를 얻기 위해 고생하고 있다. 흔히 ‘역사는 기억의 전쟁터’라는 말들을 한다. 브레히트의 시가 시사하듯 정의나 공정성과 무관하게 강자의 기억이 남아서 ‘진실한 역사’가 되고 약자의 기억은 배제되기 때문이다. 묻고 싶다. 한국의 미래를 선도할 창의적 인재를 양성하는 충남대학의 구성원들이 알고 있는 혹은 알아야 할 역사는 누구의 기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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