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하는 대학원생

  <가을방학>을 듣는다. 찬바람 적적하고 공허함이 드는 계절을 담백하게 풀어낸 느낌. 무더위와 장마를 버티고 나면 비로소 찾아오는 담담함. 그 위에서, 작열을 버티기 위해 놓아야 했던 것을 반추한다. 그 결핍된 자취를 떠올리고 안으려 할 땐 이미 겨울이 찾아와버리겠지. 그래서 가을이라는 순간은 체감되기 시작할 때 바로 느껴야 하는 감각일지도 모른다. 지금-여기를 중요시하는 수많은 상담이론처럼, 하이데거가 말한 ‘현존재’가 체감되는 문턱처럼 느껴진다면 과장일까. 사람들이 ‘일상인(Das Man)’을 조금 벗어나기 위한 감상에 빠지는 계절, 바로 이 순간. 계피(임수진)의 목소리가 가슴으로 스민다. 차가운 피아노 건반의 멜로디가 가을바람을 뿜는 것 같은데, 짙고 검박한 언어가 따스하게 자리 잡는다.

  가사에선 “넌 어렸을 때부터 가을이 좋았었다고 말”한다. 이유는 마음 같지 않은 다른 계절과 달리 가을이 와 닿았기 때문이라고 가사를 통해 추측된다. 

  좋아하는 걸 얻지 못하고 “정말 좋아하게 됐을” 땐 “그것보다 더 아끼는 걸 버”리고 떠나야 하는 인생. 그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계절이 가을이기 때문에 마음에 드는 것이다. 무려 “어렸을 때”부터 말이다. 뒤늦게 아파하고 추억하며 마주하게 하는 계절, 가을. 아프지만 역설적이게도 끌리는, 직면.

  “가을방학은 ‘비극은 항상 와야 할 마음이 시점보다 늦게 와서 발생한다’는 깨달음에 착안한 이름이다. (중략) 계피의 목소리는 3인칭 관찰자 시점이다. 그녀는 언제나 일정한 거리 두기와 담담함을 유지한다.”(정은정, 2015)는 포스트를 감안하면 음악 속 화자는 비극과 마음의 사이에 간극이 있고  거리를 두며 관찰자처럼 시점을 가진다. 사건의 순간마다 빈 공간을 둘 수밖에 없었던 주인공은 가을이 돼서야 틈을 좁힌다. 항상 늦게 와서 말썽인 “비극”을 만나는 것이다.

  사람은 불안해지면 무의식적으로 방어기제를 작동한다. 고통스러워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인지하지 못하도록 억압하기도 하고, 현실을 부인하기도 하며, 반대로 행동하고, 감정을 사고로 국한하여 회피하기도 한다. 감정을 해리시킨다. 그러나 생존을 위한 순간이 지나고 위기의 환경도 지나가면 억눌러두었던 감정은 엄습해온다. 심장을 두드리며. 나 여기 있다고, 나 너의 그 순간이라고, 날 잊을 순 없다고, 제발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다른 계절보다 풍요롭고 안녕해서, 방학조차 없는 가을이라서, 그나마 그런 감정을 마주할 수 있기에 가을이 좋은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은 많지 않다.

  ‘싫은 걸 참아내는 것만큼 좋아할 수 있는 마음을 맞바꾼 건 아닐까 싶다며’라는 가사는 추측이 아니라 진실이기 때문이다. “신피질, 즉 생각하는 뇌가 정서를 압도하고 있다”(Pat Ogden, Janiana Fisher, 2021, p. 170)는 말은 정서·감정을 수용하는 변연계를 누르고 있다는 말과 같다. 싫은 마음을 누르기 위해 좋은 마음도 함께 평생 유리되는 것. “정서 처리 과정은 정신병리학의 핵심이고 심리치료에서도 매우 중요하다.”(Frijda, 1986)는 말처럼, 이젠 꼭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순간.

  그런데 좋아했던 것과 잃어버린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이 무엇이든. 고요한 계절, 내면의 역동에 방학이 필요한 시점.

최동호 (상담교육 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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