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상공론

  0. 인간 존재는 다른 여타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원인 모르게 세상에 내던져 졌다. 그러나 타 존재와 비교하여 인간 존재는 가장 비극적이다. 

  1. 동물 / 자연은 약육강식의 진리를 드러낸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고 약자는 더한 약자를 지배한다는 잔인한 원리. 동물에겐 역사가 없다. 그것은 인간에 의해 수정되고 분석되고 소모될 뿐이다. 인간은 동물의 역사를 창조하고 진화건 무엇이건 여타 의미를 부여했다. 그래서 동물의 계보는 인간에 비해 깨끗하다. 동물의 근친상간, 본질적 폭력, 살해 행위, 생존 행위는 순수하다. 그들의 프로그램은 정확한 목적과 그것의 달성에 순수한 노력을 행사하게 만들어졌다. 생존을 위해 가장 연약한 급소를 공격하고 무력화시켜 목적을 취한다는 본질적인 행위. 그것은 비난할 수 없다. 동물에겐 계보가 없다. 어떤 의미를 부여하건 동물은 그것이 설계된 대로의 순수함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동물의 계보는 순수하다.

고양잇과의 대형 동물들은 먹이를 잡아서 살려놓고 유희를 구한다. 앞발로 건드리고, 물고 장난치며 다른 약자를 가지고 놀다가 죽여 먹는다. 그렇게 설계되었다. 인간이 그들의 행위를 보고 비난할 수 없는 건, 동물들이 덜떨어져서 그런 것이 아니다. 동물들이 인간 존재보다 원형에, 본질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없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운 것은 본질에 가장 가깝다. 자연스럽게 생명을 앗아가고 자연스럽게 생명을 내놓는다.

  2. 비극 / 인간은 모든 존재를 막론해 가장 비극적인 존재다. 역사라는 끝나지 않는 비극. 혁명이라는 거대한 착각. 상상력이라는 저주. 계보와 운명이라는 족쇄. 이 모든 것을 포함해 인간 존재의 전부가 불안 덩어리다. 심지어 인간에게 자유는 고뇌할 수 있다는 이름의 구속이다. 인간의 생존 과정은 대단히 복잡하다. 1년에 가까운  시간의 잉태와 갓 나온 아이는 혼자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구제불능의 존재다. 세상에 나온 지 1년에 가까워서야 두 발로 걷기 시작한다. 그래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 그것부터 비극의 시작이다. 인간 아이에게 있어 생존은 속임수다. 무력의 좌절감에서 오는 존재의 비극은 부모를 속이는 기만으로 나타난다. 아이는 밤마다 울어대고, 시도 때도 없이 운다. 사랑과 생존이 오묘하게 뒤섞인 비극적 울음이 인간의 존재다. 아이는 유희적으로 울며, 요구적으로 울고 기만적으로 운다. 인간에게 있어 순수에 가까운 것은 속임수 자체라는 사실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여타 존재가 그렇듯 인간도 인간적이다. 그러나 인간적이라는 자체가 비극적이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비극의 주인공이다. 비극의 조연이 아닌 주연이라는 것이 인간을 비극적으로 만든다.

  3. 가족 / 거대한 철학적 난제.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하는 난제. 이 질문의 의미는 무엇이 우선인지, 무엇이 가장 본질적인지에 대한 질문이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어머니는 누군가의 아이였고, 아이는 누군가의 어머니이다. 어머니와 아이 둘 중 누가 더 본질에 가까운가? 이 질문의 대답은 결국 아이는 어머니라는 결론이다. 아이는 누군가의 어머니였고, 어머니는 누군가의 아이였다. 아이는 어머니와 자신을 같다고 여긴다. 어머니는 아이와 자신을 같다고 여긴다. 가장 본질적인 거대한 불행은 이 동일시가 운명적이며, 필연적이라는 사실이다. 아이가 본능적으로, 생존하기 위해 그랬듯 어머니가 되어서도 반복되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수많은 통제와 억압, 기만과 폭력,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반복되는 인생의 굴레. 인간은 아이에서 벗어날 수 없고, 어머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무의식적으로 바라는 부모의 죽음과 초월의 자유, 반동형성은 그 원인이 부모 자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공포는 결국 스스로가 바라는 죄악적인, 죽음 지향적인 바램 자체에 존재한다. 스스로가 원하는 것을 스스로가 두려워할 수 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비극, 그것이 가족이라는 비극이다.

 

곽승민 (철학·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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