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카오톡

  세상은 카카오톡이 망쳤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햇빛이 아닌 폰 화면에 눈부셔 하며 반자동으로 카카오톡을 연다. 마치 기계처럼. 잠에서 채 깨지도 않은 상태로 밤새 쌓인 숫자에 대충 답하고 이부자리와 함께 저편에 던져두고 등을 훽 돌려 방을 나선다. 

  집을 나서 길을 걸으면서도 의식 없이 문자들을 완성하고 더 이상 문어체로 글을 적지 않는다. 떠올라 날아가버리는 셀 수 없는 말풍선. 우리가 토막으로 보내는 그 말들은 문자 그대로 풍선처럼 가볍다.

  언제부턴가 말이 아니라 풍선말을 하고 있다. 우리는 글자를 적고 있지만 글을 적지는 않는다. 나는 그 많은 글자들을 주고 받으며 대체 언제 글을 썼고 언제 글을 받았고 글을 전했냐고 되물었다. 대체 언제 진드감치 앉아 내 지난 날들을 생각했고, 내 ‘생각’을 전하려했고, 설득해보려 했고, 언제 다른 이가 쓴 긴 글을 시간을 들여 읽고,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 했는지 되물었다. 

  하루에도 몇 백 개씩의 말풍선들을 만들어내고 있음에도 내 마음 속에 남아있는 것은 없다. 엄지손가락 몇 번의 움직임으로 완성되는 획들은 내 생각의 속도를 쉽게 따라잡고 획들은 화면 뒤로 거름망 없이 배출된다. 어쩌면 요즘 시대엔 말을 하는데 필요한 것이 마음과 입술과 혀가 아니라 손가락 하나뿐이다. 이런 수정이 없는 쏟아냄은 쉽고 거리낌이 없고 얕고 빠르며 비약적이고 상시적이며 때로는 폭력적이다. 

  제약 없음의 폭력.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가벼운 말들을 마주쳐야만 하는 제약 없음을 자유라고 부르고 있다. 무게를 덜기 시작하면 더 이상의 무게는 짐이 된다. 한없이 가벼워지는 것에 길들여지는 노예. 

  그나마 생일 때 적었다는 편지도 이제는 기프티콘 카드가 대신한다. 소중함과 진정성은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고 장식이나 사치가 되어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이 막다른 곳에 내몰렸다. 

  사람들은 더 이상 무게를 두려 하지 않는다. 하고 있는 말들이 소통이 아닌 그냥 문답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반자동적인 문답은 당신을 기계로 만든다. 어떤 것의 심연을 깊게 들여다보는 것은 이제 시간 낭비요, 기계들에게는 심연이란 존재하지도 않는다. 기계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작동을 멈추고 대체 뭐가 중요한지 생각해봐야한다. 무게를 매길 수 없는 가치의 중요성에 대해서 생각해봐야한다. 

  당신은 언제 편지를 마지막으로 적었나? 이 글을 읽는 것을 멈추고 지금 떠올려보라. 살면서 몇 번의 편지를 써보았나? 죽을 때까지 간직하고 싶은, 오직 나를 위한 문장이 들어있는 편지를 받아본 경험이 있나? 나는 다른 이에게 그런 편지를 적어준 적이 있나? 내 글을 공들여 정성으로 읽어줄 만한 다른 이는 있나? 

  편지를 적자. 우리는 가치를 만드는 데에 시간을 들여야 한다. 책상에 자리를 잡고 편지지와 연필을 준비하자. 

  자세를 고치려 엉덩이를 몇 번 옮기는 과정에서는 어떤 마음을 닿을 수 있을지에 대한 설렘을 느낄 수 있고, 어떤 말들을 전할 지에 대한 고민을 한 번 더 할 수 있고, 내 생각의 속도를 채 따라오지 못하는 한 획 한 획을 적으며 이건 아닌가 싶다 하면 적으려다 적지 않을 수도 있고, 떠오르지 않던 사랑이 획을 더하는 시간 안에 피어오를 수도 있고, 정성 담긴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 신경 쓰는 글씨체도 머리를 긁적이며 쑥쓰러워할 수도 있고, 마지막으로 내 이름을 적을 때는 나는 당신의 무엇인지, 내 이름 앞에 어떤 미사여구를 붙일 수 있는지, 내가 전하고 싶은 말은 다했는지, 혹여나 실수는 없는 지 봉투 안에 넣기 전 나의 말을 다시 한 번 돌아볼 수도 있다. 

  한 통의 편지 안에는 꾹꾹 눌러 담은 한 사람의 온전한 시간과 마음과 공간이 있다. 편지는 보낸 문장 수가 숫자로 표현되지 않는다. 그저 항상, 한 통의 편지일 뿐이다. 숫자로 표현되지 않는 셀 수 없는 마음 하나를 전해야 한다.

곽승민 (철학·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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