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줄이 비워지지 않는 세계의 밤

  불편한 기시감에 툭, 멈칫하게 된다.

  8월의 문턱이 지나자 더위가 예사롭지 않았다. 기습처럼 비가 쏟아졌다. 물방울이 불안정한 대기를 벗어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안정적인 대지에 안착하기 위해 사활을 걸고 달려드는 듯. 그 수가 너무 많아 넘쳤다. 

  하필 자리도 없는 서울에 많이 내렸다. 서울은 잠겼다. 어떤 사람은 누군가를 잃었고, 어떤 사람은 무엇을 잃었다. 

  또 다른 누군가는 너무 많은 감정을 쏟았다. 상처를 받은 사람이 오래 앓는 것이 있다. 빗줄기의 자취가 가슴속에 점선 같이 남게 되는 그런 것. 그 점선에 비가 오버랩 되면 세상은 가득한 철창이 된다. 입을 앙다물고 가쁘게 호흡을 골라야 하는 그러한 감옥이 된다.

  중학생 때 오래된 촌집에서 살았다. 주변 도로가 새로 포장되면서 거리가 높아졌다. 집이 반지하처럼 낮은 지대가 되었다. 약간 볼록한 아스팔트가 대문의 턱이 되었다. 

  여름이 되자 비가 많이 내렸다. 마당의 배수엔 문제가 없었으나 쏟아지는 비에 속수무책으로 수위가 오르고 있었다. 현관문을 뛰쳐나가 문턱을 올려도 소용이 없었다. 대청마루의 밑바닥 가깝게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119는 모두 출동 중이라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급하면 읍사무소(현 행정복지센터)에 배수기가 있으니, 그곳에 도움을 요청하라는 조언이 있었다. 읍사무소에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배수기는 이미 비닐하우스로 나가 있어서 안 된다고 했다. 여기는 사람이 사는 집이라고 했지만, 이미 나가 있는 배수기는 돌릴 수 없다며 역정을 냈다. 

  방에선 어머니와 동생이 발을 구르고 있었다. 수위가 오르고 있다. 친구를 불렀다. 두 명의 친구가 오토바이를 타고 신속히 왔다. 셋이서 대야로 마당의 물을 퍼서 대문 밖으로 나르기 시작했다. 대청마루를 찰랑 거리며 오르던 수위가 멈칫, 하였다. 두 시간 정도 비와 밀고 당기기를 쉴 틈 없이 이었다. 

  거짓말처럼 빗방울의 빈도가 줄더니 그쳤다, 곧 해가 고개를 내밀었다. 마당의 수위는 눈에 띄게 낮아지고 있었다. 무겁게 젖은 옷을 짜 말리듯 어금니를 앙다물었다.

  매슬로우는 욕구 이론을 주창하며, 계층화된 욕구가 낮은 수준부터 차례차례 충족이 돼야 다음 단계의 욕구로 동기화 될 수 있다고 했다. 쉽게 말해 하위 욕구인 생리와 안전이 충족되지 않으면, 소속감 및 애정의 욕구나 존중의 욕구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굳어진 스키마처럼, 생존에 유익하기 위해 태도를 고착시킨다. 

  취업준비가 바쁘니까 학과 생활과 동아리 생활을 하지 않고, 경제적으로 고단하니까 연애를 실천치 않게 되는 것. 기본이 사치가 될 때 꿈꿀 수 있는 건 꿈뿐이다. 범람의 기억도 오래 남으면 마찬가지일 것이다. 철창은 걷히지 않는다.

  다르다는 일갈은 입을 다물게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도움이 되진 않는다. “내담자들은 현재에서 과거 경험을 분리하고 스스로에 대해 좋은 느낌을 갖기 어려워한다. (중략) 검토되지 않은 방어 체계는 일상생활에서 기능하고, 적응적으로 반응하는 이들의 능력을 손상시킨다”는 트라우마 심리치료서의 한 대목처럼, 불가항력인 까닭이다.

  차라리 격려를 해주는 게 어떨까? 그 모든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생존하고 나아가고 있는 모습은 충분하다고. 칼 로저스는 충분한 긍정·공감·성장을 통해 자신을 일치 시켰을 때 자기실현이 이루어지며 ‘온전히 기능하는 사람’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했다.

  그 힘으로 욕구를 충족하고 마음 속 빗줄을 지워나가면 좋겠다. 금방 복구된 강남처럼, 마음 졸인 이들도 어서 회복돼 나아가기를.

최동호 (교육학과 석사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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