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대인의 보모(?) 윤경식(64)씨를 만나

 우리학교의 역사 45년 중 그 반 이상인 24년을, 보운 캠퍼스에서부터 현재까지 같이하는 아주머니가 있다. 바로 서문에 위치한 전원식당의 윤경식(64) 아주머니. 자신이 걸어온 삶은 너무나 평범하고 소박하기에 “내가 민들레처럼에 나올수 있나?” 하시며 특유의 억양(?)으로 계속해서 의문을 제기했지만, 결코 평범하지만은 않은 삶이었다.
 윤 아주머니에게는 한국의 어느지방에서도 들어볼 수 없는 특유의 억양이 있다. 알아보니 이북식 억양이었다. “내가 48년도에 월남했어. 그러니까 여중 2학년때지. 아버지가 안좋은 일을 당할 위기에 놓여 있어서 아버지는 먼저 월남하고, 남은 가족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몰래 38선을 넘어왔지. 넘어오다 보안서에 붙잡혀 포천 수용소, 의정수용소로 옮겨 다녔지. 하지만 아버지와 연락이 가까스로되어 가족이 한집에 살수 있었지. 그땐 힘들고 어려웠어도 행복했었어”라며 월남배경을 말씀해 주신다.
 “이북에서 내려와서 처음엔 많이 힘들었지. 하지만 그 와중에도 고등학교까지는 나왔지. 아래 동생들이 많으니 대학은 포기할 수 밖에 없었고, 그래도 임시교사였지만 8개월동안 교편을 잡았었지”라고 하는 말속에서 학업에 대한 미련이 깊이 배여있었다.
 “임시교사 후에 KBS 부산방송국에서 일했지. 원래 가수로 시험봐서 붙었는데, 날 지켜보시던 어떤분이 직원으로 추천하시더라고, 아나운서를 권유했지만 내가 부끄러움도 잘 타고 자신도 없어서 거절하고 그냥 정식직원으로 2년 일했지. 그때 지금은 돌아가신 우리 아저씨를 만났고 말이야”라며 눈시울이 글썽인다. 아주머니와 돌아가신 아저씨 고향이 모두 북한이기에 제사나 명절때면 유독 북한이 생각나신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도 말속에 배어있는 북한식 억양이 고향에 대한 잊혀지지 않는 향수 때문이라 생각된다. 봄에는 친구들과 꽃구경 다니고, 여름에는 고향 주변에 유명한 원산 해수욕장이 있기에 거기서 보내고, 가을에는 단풍구경 다니고, 여울에는 스키장에서 놀았던 추억. 아주머니의 아름다운 유년시절의 추억이다.
 아주머니가 보운 캠퍼스에서부터 식당에서 일한 배경은 너무나도 평범했다. 가사에 도움을 주기위해. 지금은 자식들 모두가 독립하여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고 있지만, 봉급생활하는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기 싫기에 지금도 계속한다고 한다.
 다른 식당에 비해 유난히 배가부를정도로 많이 주고 맛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학생들도 용돈을 타서 쓰는데, 배가 든든해야 공부를 해도 뭘 해도 열심히 잘 하지”라고 말하신다. 학생들이 밥 잘 먹고, ‘맛있다’라는 말에 흐뭇함을 느끼고, 가끔씩 학창시절 그 맛을 못잊어 임신한 여인이 찾아와서 ‘칼국수’를 달라고 했을때 그리고 이제는 교수가 된 사람들이 찾아올때 뿌듯함을 느낀다고 한다.
 “우리 충대학생들은 아무리 험악한 세상이라고 말하지만 참 소박한 것 같아. 그리고 인사도 잘 하고,  예의도 바른것 같고. 난 우리 충대학생들이 건강하고 올바르게 잘 커서 사회에 힘이 되는 사람들이 됐으면 좋겠어”라고 당부하신다.
 아주머니의 굵은 손마디와 거친 손등이 아주머니의 삶을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마 아주머니는 학생들에게 밥만을 파는 것이 아닌 그 위에 ‘인정’을 엊어주시는 것 같다.

유재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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