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류재을군 조문을 다녀와서

 1차 방문지인 조선대는 생각대로 무척 예쁘고 넓었다. 그리고 어느 선배의 말대로 ‘데모 잘하는 학교는 다르구나’였다. 물론 그 대학 행정학과 96학번인 류재을 선배의 사망이었으니까 더욱 그랬을 것이다.
 솔직히 난 ‘현실’에 감동받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영화나 책을 보고는 울지만, 그런 극렬한 현실 앞에서는 울며 쓰러지기 보다는 똑똑히 바라보고 일어서는게 중요하다고 배웠다. 하지만 이날은 눈물이 핑 돌았다. 자식을 잃은, 더구나 사고나 자연사가 아닌 폭력에 희생된 그의 어머니 앞에서는 나라는게 얼마나 무기력 했던지... 입도 열 수가 없었다. 욕지기가 치밀어 오를 것 같고 토해버릴 것 같았다. 내가 아무리 “어머니 아드님 몫만큼 살께요”라고 한들, 그게 얼마나 교만한지 배웠기 때문에 더욱 무력했다. 할 수 있는 일은 눈물을 삼키는 일 뿐이었다.
 20년도 안되는 삶 속에서 스스로의 한계에 절망한 적은 단 두번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하나는 실연이었고, 하나는 5 · 18 묘역에서 였다. 5 · 18묘역을 찾은 건 두번째였다. 한번은 중3때 김영삼 후보가 막 당선되고 난 직후였고 또한번은 이날 - 김영삼 대통령의 정권 말기 - 이었다. 느낀건 단 한마디면 족할지도 모르겠다. 슬펐다.
 거창하게 싸우겠다, 이런 썩을세상 다 뒤집어 엎고 새로 태어나게 하겠다 같은 말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 류재을 선배의 어머니 말씀대로 혼자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니 거창한 말 같은 것으로 들뜬 기분을 떠들어대는 것은 못한다. 다만 이 일을 15년쯤 후에 갓 100일 된 우리 조카가 16살이 되면 이곳으로 데려와 차분히 이모가 16살때 처음 광주에 와, 본 것이 무엇이었는지 5 · 18묘역에서 어떻게 울었는지 들려주고 싶다. 그 때까지, 망월동의 묘역이 더 늘어나지 않길 빌고 싶다. 그리고 그렇게 되도록 애써야겠다.

민 지 영
(문헌정 · 1)

저작권자 © 충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