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는 왜 시끄러울까?

  시청에서 일을 보고 북문을 통해 나오는데 도로 앞에서 노랫소리가 크게 들렸다. “민주주의여 만세”라는 가사가 들어간 노래였다. 아마 김지하의 시 ‘타는 목마름으로’를 원작으로 작곡된 민중가요였을 것이다. 함께 시청을 나오던 이는 “아유 시끄러워. 듣기 싫어 죽겠다”라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우리는 집회 참석자들이 든 피켓을 자세히 읽어볼 사이도 없이 그들을 지나쳤다.
  현수막에서 언뜻 봤던 단어를 조합해 검색해보니, 그곳에서는 한 가지의 시위만 일어나고 있는 게 아니었다. 도안동 근처의 갑천지구 개발로 인한 환경 파괴에 반대하는 집회도 있고,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도 있는가 보다. 나 역시 형법상 낙태죄가 완전히 폐지되기 전인 2020년 겨울 임신중단 합법화(낙태죄 폐지) 기자회견을 하러 시청 북문에 간 적이 있었다. 거기에는 집회 참가자를 위한 에티켓 문구도 걸려있다. 
  대전시청은 시정 업무와 민원을 위한 건물이고 주변에는 우정청과 상가, 오피스텔이 있다 보니 근처에서 일하고 거주하는 사람들의 고통도 이만저만이 아닌 듯하다. 대전시청의 온라인 게시판에서는 버스 노조 때문에 시끄러워 못 살겠다는 2007년 민원글도 찾아볼 수 있다. 서울 지하철에서 수개월째 진행 중인 장애인 이동권 시위는 시민을 불편하게 만드는 나쁜 시위라는 화살을 맞으며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시위가 불편하고 시끄럽다는 말은 2014년 세월호 사건 이후 으능정이 거리와 궁동 로데오 거리에서 있었던 ‘가만히 있으라’ 집회를 떠오르게 한다.
  큰 마이크를 소유한 사람의 말은 중요하든, 중요하지 않든, 공익에 도움이 되든 그렇지 않든 뉴스 기사로 발행되고 SNS로 확산되고 구전되기 쉽다.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살기를, 가만히 있기를 요구받는 마이크 없는 이들의 언어는 열심히 퍼 날라야 몇몇이 들을까 말까다. 쳐다보게 할 권력과 자원이 없으니 눈에 띄는 빨간색을 사용하고 확성기나 앰프를 쓴다. 53일간 단식을 하는 극단적인 행동을 해야 시민 중 일부가 겨우 그 사안이 무엇인지 알 정도의 힘밖에 없는 일반인들이 대부분이다.
  한편 바스티유 습격 사건은 파리 시민들이 군중 보훈병원에서 3만 정의 소총을 빼앗고 수비병과 부딪힌 폭력을 저질렀음에도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으로 칭송받는다.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는 원래 프랑스 혁명 시기의 혁명가였는데 지금은 프랑스의 국가(國歌)로 채택돼 불린다. 동학 농민 운동은 무장봉기였으나 조선 역사상 가장 큰 항쟁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가지며, 3.1 운동에 영향을 끼친 우리 민족의 정신이라고 배웠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는 같은데, 마이크 없는 자들의 반란인 건 마찬가지인데, 언제부터 시위는 시끄럽고 귀찮고 불편한 것이 된 걸까. 
  그러니까 데시벨이 높은 게 정말 문제인지, 어떤 종류의 시위들이 시끄러운 것으로 보도되는지, 언론에 광고를 뿌리며 자금줄을 대는 곳은 어디인지가 중요한 거다. 어떤 이미지가 선택적으로 편집돼 보이는지, 메시지는 지워진 채 소음이나 불편함에 관해서만 알려지진 않는지 엄밀히 따져봐야 한다. 그 시위로 바뀔 세상이 나에게 해를 끼치는 것인지,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인지, 저런 형식으로 시위를 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1학생회관 앞 민주광장에서 바람 잘 통하는 몽골 텐트를 치고 학과 행사만 해도 덥고 지치는데 뭐 때문에 이 더운 날씨에 며칠씩 시청 앞에 천막을 치고 딱딱한 바닥에 누워 자는지, 지나가는 이들의 시선을 붙잡으려고 애를 쓰는지, 시민의 마지막 수단을 사용하는 이유를 살펴보는 것이 같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책무라고 생각한다.

공연화 (여성젠더학과 석사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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