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은 누구이며, 고담시의 불행은 누구의 탓인가?

  배트맨 시리즈의 시작은 고담시의 불행에서 시작된다. 하나의 도시 안에서 벌어지는 수위 높은 범죄로부터 배트맨은 시민과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을 지켜낸다. 하지만 그의 탄생조차도 가족이 맞게 되는 죽음의 비극에서 비롯된다. 
  주인공 브루스 웨인은 부모님이 강도에게 살해당한 뒤 배트맨으로 거듭난다. 그는 부모의 죽음에서 비롯된 자신의 분노를 도시 내 범법자를 응징, 처치하는 행위로 표현한다. 범법자가 도시에 가하는 위협적인 범죄는 정의로 다스리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 활동하는 박쥐에서 모티브를 얻은 배트맨은 회색의 도시 ‘고담’에서 자신의 신분을 가린 채, 정의를 구현한다.
  “I am a revenge.” 그는 스스로를 복수의 상징으로 등극시키며, 정의에 대한 자신의 행위를 지속적으로 관객과 고담 시민들에게 그리고 범법자에게 상기시킨다. 하지만 그가 외치는 정의는 옳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인가. 고담시의 믿음직한 히어로이자 자기방어를 위한 폭력을 최선책으로 하되, 살인은 하지 않는 그의 방식만이 고담시를 살릴 수 있는 방향이었는지 생각해보는 것이다. 내가 여기에 던지는 질문은 크게 두 가지다. 배트맨의 방식이 최선이었는가. 그리고 왜 고담시는 같은 범죄가 끊임없이 지속되는 도시가 된 것인가.
  사실 이 영화는 배트맨이라는 신적이고 영웅적인 존재를 배제했을 때, 부패가 지속돼 망해가는 사회현실을 보여주는 다큐와 같다. 도시 내 고아는 매년 그 수를 동일하게 이어가며, 그들은 제대로 교육받거나 대우받지 못해 범죄자의 길로 흘러 들어간다. 정부가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해 사회에서는 보이지 않는 음지의 구역이 자꾸만 생겨나며, 그 속에서 범죄행위가 끊이질 않는다. 오히려 그들을 돕는 것은 시민에 불과한 웨인가의 몫이다. 브루스 웨인의 오랜 친구이자 집사인 알프레드는 말한다. “도련님이 웨인가의 고아원 후원을 그만둬 더 이상 그들이 갈 곳이 없답니다.” 부자의 돈이 다시 도시로 흘러가게끔 만드는 건 정부의 역할이다. 더 많이 가진 자의 돈을 거둬 사회의 균형을 맞추자는 하나의 강압인 것이다. 하지만 고담시에서는 그것을 백만장자 브루스 웨인이 스스로 행하게 설정함과 동시에 이후의 책임 또한 그에게 묻고 있다. 
  고담시는 망해가고 있다. 몇 년간 지속되는 범죄는 제대로 된 근본적 처치 없이 오직 처벌로만 다스려지고 있다. 정부는 범죄 발생 이후 말뿐인 약속으로 시민들을 안심시킨다. 시민들이 그 안에서 안정과 소속감을 느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다. 본질적 문제는 해결되지 못한 채 방치되는 것이다. 배트맨은 부모에 대한 복수와 도시 내 자신의 역할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것은 표면적이고 일시적인 행위이자 경고에 불과하다. 오히려 망가진 도시에서 배트맨의 존재는 하나의 종교처럼, 시민들에게 일방적인 믿음을 부여하는 존재로밖에 인식되지 못한다. 그의 존재가 또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은 계속될 것이며, 변화하지 않는 사회는 더 큰 불안을 초래할 것이다.
  고담시처럼 우리 사회에도 빌런은 끊임없이 등장한다. 우리는 범죄에 대한 처벌마저도 다양한 잣대를 들이대 속 시원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배트맨은 관객들에게 쾌락과 희열감을 선물하는 존재임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가 실존하는 고담시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고담시 내 가난한 이들의 이야기에는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은 음지에서 살아남기 위해 버둥대지만, 그 끝은 언제나 범법자의 길이었다. 배트맨과 웨인가라는 재벌에 의존하고, 정부는 그들의 권리와 소속감을 앗아가길 반복한다. 이 사회의 진정한 빌런은 살인을 저지르고 시민을 공포에 떨게 하는 하나의 인물이 아니다. 고담시를 자꾸만 부패시키고 어둠 속에 밀어 넣으면서도 단 하나의 해결책이나 빛을 내어주지 못하는 정부 그리고 그 도시에서 쉽사리 자신의 역할을 표하지 못하는 다수이다.

이주희 (독어독문학·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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