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무뎌진 사회

김도균 기자,  사회학과

  지긋지긋한 코로나19가 종식은커녕 그 위세를 더욱 떨치고 있다. 일일 확진자 수가 60만 명대까지 치솟더니 유행 양상은 ‘긴 꼬리’ 형태로 장기화하고 있다. 3월 한 달 동안 발생한 국내 코로나19 사망자 수는 8,000명이 넘었다. 이는 한국 역사상 단일 질병이나 재난으로 인한 월간 사망자 가운데 최대치다. 지난달부터는 전국적으로 화장장과 더불어 시신 안치실, 빈소까지도 자리가 부족할 지경이라 하니 그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코로나19 사망자는 끊이질 않고 있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사회의 태도는 사뭇 다르다. 팬데믹 초기를 회상해보자. 당시 사망자가 나온 날이면 온 나라가 떠들썩해졌다. 이들의 안타까운 사연과 유족의 눈물은 언론을 통해 하나하나 보도됐다. 댓글 창에는 추모와 애도의 물결이 이어지는 동시에 ‘서로를 위해 개인 방역을 철저히 하자’는 훈훈한 다짐도 오갔다. 답답한 일상에 불편을 호소할지라도, 떠난 이들과 유족의 아픔만큼은 기억하고 함께할 줄 아는 사회였던 것이다. 정부가 자랑하던 ‘K-방역’은 그렇게 빚어진 산물이었다. 
  최근에는 어떨까. 언론에서 보도되는 사망자는 그저 숫자로 매겨진 ‘지표’에 불과하다. 일일 사망자 수가 역대 최대를 기록할 때면 정부의 방역 정책을 두고 벌어진 살벌한 정파 갈등이 뉴스를 채운다. 주변에서는 ‘치명률도 낮은데 거리 두기 그만할 때 됐지 않냐’는 넋두리가 쏟아진다. 사망자 증가를 감수하더라도 방역 조치를 전면 완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편, 미국은 시민들은 물론 대통령과 국회의원들까지 나서 코로나19로 목숨을 잃은 이들을 기리는 행사를 종종 연다. 그날만큼은 정파를 막론하고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추모에 동참한다. 체코 역시 지난해 한창 방역 조치를 완화하던 때 프라하 성 앞에 수만 개의 촛불을 밝히고 묵념식을 가졌다. 단순히 ‘우리나라는 왜 추모 행사를 하지 않는지’ 따지기 위해 꺼낸 얘기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치열한 방역 논쟁에 목매단 나머지 정작 희생자들에게 무심했던 건 아닌지 되돌아보자는 소리다. 
  방역당국은 지난 1일 코로나19 대응 정례브리핑에서 향후 방역 조치를 대거 해제할 수 있다고 예고했다. 비록 사망자가 꽤 나오고 있지만 우려할 수준은 아니라는 판단에서다. 일상회복에 대한 기대감 덕분인지 거리에는 꽃구경 삼매경에 빠진 사람들로 가득하다. 이처럼 조금씩 생기가 도는 바깥 풍경을 보면 이다지도 기쁘지만, 한편으론 누군가의 죽음에 무뎌져 버린 우리 사회가 차갑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방역이 완화될 때마다 사망자가 급증하는 양상을 보였다. ‘단계적 일상회복’이 처음 거론됐던 지난해 말은 물론, 방역패스가 해제된 지난달도 당시 기준 월간 최대 사망자 기록을 경신했다. 사실상 우리가 되찾은 자유의 이면에는 감염취약층의 희생이 있었던 셈이다. 
  방역을 점진적으로 완화하는 것에 반대하는 건 아니다. 다만, 적어도 코로나19로 생을 마감한 이들을 등한시하지 않았으면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죽음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또 평생을 함께한 사람과의 이별을 감내해야 할 이들이 있음을 모두가 경건한 마음으로 되새기면 좋겠다. 불가피한 죽음, 소중하지 않은 삶은 그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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