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제주에서 일어난 일

  1919년 3월 1일,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잊지 못할 역사가 기록됐다. 온 국민이 거리로 나와 독립을 울부짖었던 날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28년 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할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3·1 발포사건이다. 
  우리나라는 전국적인 3·1 운동 이후 26년 만에 광복을 맞이했으나, 정식 정부가 출범하지 못해 미군정의 통치를 받아야 했다. 당시 제주사회는 약 6만 명의 귀환인구가 실업난을 겪었고 생필품 부족, 콜레라 창궐, 극심한 흉년과 식량정책 실패, 군정의 부패 등 크고 작은 사회문제가 잇달아 발생했다. 어지러운 정세 속, 제주에서는 3·1절 기념행사가 계획되고 있었다. 
  이 3·1절 기념행사에서 좌익계열이 반미시위를 계획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미군정청은 직장 단위 기념행사 이외의 옥외행사를 금지시키고 경찰 100여 명을 곳곳에 배치했다. 긴장감이 맴돌던 1947년 3월 1일, 제주에는 3·1절 정신을 계승하고 기념식을 우리 손으로 쟁취하자는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오전 10시, 기념식이 시작되고 책임자는 개회사에서 “우리 제주도민 모두 3·1 혁명의 정신을 계승해 외세를 물리치고 자주통일 민주국가를 세우자”고 강조했다. 
  기념식은 순조로이 마무리됐고 경찰은 해산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뜨거워진 열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때 제주북초등학교 인근 도로에서 한 어린이가 기마대에 치이는 사고가 발생했다. 기념식의 시위대는 “경찰이 어린아이를 죽였다”고 외쳤고 경찰은 삽시간에 통제력을 잃었다. 이때 경찰이 발포한 총알에 6명이 숨지고 8명이 다치는 3·1 발포사건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3·1절 기념식을 주도한 민주주의민족전선은 3·1사건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발포 명령을 한 경찰관의 처벌과 사과, 피살자에 대한 보상 등을 요구했지만 경찰은 이를 묵살하고 시위 주동자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일주일이 지난 3월 8일, 3·1 발포사건 조사를 위해 미군정청·주조선미육군사령부에서 합동조사단을 꾸렸으나 미군정청의 부실한 진상조사와 처벌에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민·관이 총파업에 돌입한 것이 3월 10일이었다. 이어지는 3일 동안 제주에서는 전체 직장의 95%에 달하는 166개 기관·단체가 파업에 가세했다. 
  당시 지방경찰청 격의 경무부는 제주 파업 사태를 “원래 제주도는 주민의 90%가 좌익 색채를 가지고 있다”고 발언하며 파업 주모자에 대한 검거 작전을 벌였다. 이후 한 달 만에 500여 명이 체포됐고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됐다. 이 구금자들에게는 경찰의 고문이 잇따랐고, 1948년 3월에는 3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해 탄압받던 이들의 부아가 극에 치달았다. 
  이에 1948년 4월 3일 새벽, 한라산에서 경찰·서북청년단의 탄압중지, 통일정부 수립촉구를 외친 봉기가 시작됐는데 이것이 바로 4·3 사건의 경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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